만일 나에게 한국교회 14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신사참배 정화 운동의 실패를 들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당시 한국교회가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신사참배에 굴종한 것에 대해 진정성 있는 회개와 정화(淨化) 운동을 벌였다면 이후 한국교회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해방 후 대한민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사참배 문제의 정리였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는 단순한 종교적 우상숭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 종교적 충성을 강요하고 일제의 패권전쟁을 정당화하며 국민을 동원하려는 수단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엄혹한 시기에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한 자들이 있었다. 바로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투옥된 소위 ‘출옥성도’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일제의 거짓 선전에도 불구하고 패전이 가까움을 직감했다. 감옥 안에서 그들은 해방 후 교회의 재건을 논의했고 가장 중요한 과제로 우상숭배와 일본화(化)로 타락한 교회의 영적·도덕적 회복을 꼽았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모든 교역자가 두 달간 자숙과 회개의 시간을 가지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 기간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하고 이후 교역자가 다시 직무에 복귀하도록 하는 것이다. 단순한 개인적 회개로는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공식적인 권징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이들이 저지른 죄에 비하면 턱없이 짧았으나 교회의 공백기를 길게 끌 수는 없었다.
출옥성도의 제안은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이면서도 너그러운 제안이었다. 그에 따르면 신사참배에 가담한 교역자들은 공식적으로 징계를 받은 뒤 다시 목회직을 수행하고 출옥성도는 그들을 용서하며 화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가담한 목사들은 이를 극구 반대했고 결국 7년에 걸친 정화의 노력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왜 신사참배 가담자들은 이 자숙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교권주의, 즉 교회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만일 두 달의 자숙안이 수용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해 본다. 예컨대 두 달의 공백기 평양의 한 큰 교회에서 손양원 목사를 초청해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고 생각해 보자. 6년간 옥고를 치르며 그의 몸은 쇠약했고 행색은 남루했다. 그러나 강단에 선 손양원은 ‘손불’이라는 별명답게 불같이 회개를 외쳤다. 자숙 중인 목사는 잘 다린 양복 차림에 기름 바른 머리로 앉아 있었을 터였다. 회중의 눈에는 낡은 옷의 손양원이 거인처럼 보였고 기득권 목회자는 초라한 겁쟁이로 보였으리라. 또한 자숙 기간 중 노회나 총회가 열렸다면 교권은 자연스럽게 출옥성도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해방 후 지도자들은 교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여겼고 회개 대신 교권을 택한 것이다.
신사참배에 가담한 지도자들의 일부는 일제의 강요와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여했을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일제하에서 영화(榮華)를 누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일제의 지배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일제는 무너졌고 해방이 찾아왔다. 그렇다면 당연히 판단의 오류를 시인하고 돌이켜야 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감옥에서 고생한 이들을 우대했어야 마땅하다.
교권주의자들이 회개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45년 11월 평북 선천에서 ‘신사참배 통회자복 금식기도 수양회’라는 긴 이름의 집회가 열렸다. 목사 200여명과 수많은 성도가 모였고 강사로는 출옥성도 이기선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망명했던 박형룡 같은 신학자가 초청되었다. 그러나 주최 측은 교권주의자들이었으며 장소 또한 38년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시무하는 월곡교회였다. 출옥성도들은 이 자리를 통해 공적 회개와 자숙을 촉구했지만, 주최 측은 이를 양심의 위안을 얻고 지도자의 자리를 정당화하는 통과의례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는 철저히 회개하고 교권을 내려놓을 기회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끝내 무산되었다. 일제의 잔재와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끗이 청산하고 거룩한 교회로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놓쳤다. 뒤이어 정화 운동을 주장하던 고려파의 분열(1952년)이 따라왔다. 교회의 두 속성, 곧 순결성(purity)과 연합(unity)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다. 이후 한국교회는 정의롭고 순결한 자들은 숨죽이고 교권주의가 판치는 무대가 되고 말았다.
해방 후 시대정신은 일제 청산이었다. 그러나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실패했고, 일제 잔재는 청산되지 못한 채 혼란 속에서 정부가 수립되었다. 만일 이럴 때 기독교인들이 철저히 회개하고 일제를 청산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 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한국교회는 오래도록 대한민국의 양심으로 존경받았을 것이다. 그 일은 두고두고 한국교회의 타락을 막아주는 신앙의 고향이 되었을 것이다. 만연한 세속주의 한복판에서도 무기력에 빠지지 않는 희망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