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목사의 햇볕 한 줌] 기후약자 돌봄과 교회의 역할

입력 2025-08-27 00:30

기후위기는 온 인류가 당면한 재앙이다. 그러나 그 재앙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몇 해 전 태풍 힌남노로 인한 홍수 피해 복구에 참여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홍수가 가난한 집은 기가 막히게 알아서 찾아가는 것 같아요.” 부서지고 침수된 집들 대부분이 가난한 가족들의 거처였다. 2022년 8월 8일 밤 쏟아진 집중호우로 서울 관악구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일가족 3명이 반지하에 갇혀 숨진 일은 문제의 소재를 여실히 보여 준다. 온 국민이 슬퍼하고, 언론이 소리 높여 대책을 주문했지만 반지하 가구들에 대한 홍수대책은 큰 진전이 없고 수도권의 반지하 가구는 오히려 늘어났다고 한다. “피조물의 탄식”(롬 8:22)을 이보다 더 생생히 실감할 수 있을까.

갈수록 더해지는 여름의 폭염에 모두 힘들어하지만 적절한 냉방시설 없이 버텨야 하는 독거노인들의 고통에는 비할 바 아니다. 기후로 인한 재난이 갑자기 닥쳤을 때 자가용으로 이동할 수 있는 사람과 대중교통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 자기 발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과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의 처지는 전혀 다르다. 코로나19로 인한 불편함을 모두가 감당해야 했지만 장애인과 공동생활시설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구별을 보존하기 위해 다각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먼저 탄소배출 저감, 재생에너지 전환 등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전지구적 노력을 촉구해야 한다. 유권자로서 정치에, 소비자로서 경제계에 요구해야 한다. ESG는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기업에 우선 투자하겠다는 훌륭한 지침이다.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로 하겠다는 RE100도 유의미한 시도다. 우리는 이런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가지는 한계 또한 직시해야 한다. ESG나 RE100은 선진국과 거대기업 간의 경쟁 안에서 구동되는 원리다. 기본적으로 앞서 나가는 나라들, 거대기업에 유리한 게임의 장이다. 투자자와 소비자를 위한 이미지 관리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뒤로한 채 수치로 표현되는 형식적 성과에 그치는 일도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기독교의 노력은 그보다 작아야 하고 또 그보다 커야 한다. 작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현실화한 기후재난 가운데 고통받는 이웃들의 삶에 관심을 두고 돌보는 일이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당장 그늘, 한 모금의 물, 대피소까지의 이동권이 시급하다. 그들의 아픔을 듣고 공감하는 일은 교회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다. 환경보호를 위한 지역 단위의 운동을 조직화해 내는 ‘작은 일’에도 교회가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성경이 제시하는 가치관은 정부와 기업의 시각보다 훨씬 더 크다. 정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기업은 이윤 추구라는 현실적 목표를 넘어서기 힘들다. 선거에 도움이 되고 기업 경영에 득이 되는 선에서 그들은 생태계 보전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성경은 훨씬 더 큰 비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기후약자들의 고통에서 온 피조세계의 신음을 듣게 하며,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를 초청한다. 이 큰 비전을 갖고 기후약자들을 돌보고 생태계 보전에 회복하는 작은 실천에 동참할 때 우리의 관심과 감각이 변화되고 가치관도 바뀔 것이다. 극단적인 경쟁 사회에 살면서 딱딱해진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좁아진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줄 것이다. 세상은 ‘효율’과 ‘이익’의 잣대로 돌아가지만 기후 정의는 ‘사람’과 ‘관계’가 중심에 올 때 확립될 수 있다. 성경적 가치관이 그 회복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돌이켜 보면 ESG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인은 소비자들에게서 왔다. 소비자들의 환경에 대한 의식이 높아가고 기업들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흐름을 투자자들이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판단에 힘입은 것이다. 생태계에 책임 있는 정책과 정당도 결국 유권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백성들의 방황을 보고 장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셨던 예수님을 본받아(마 9:35~36) 피조세계의 탄식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약한 이웃을 더욱 귀히 여기고 돌볼 줄 아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이 세계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