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연상돼 금기였던 ‘극우’
드디어 한국 정치 전면에 등장
거리에 머물던 아스팔트 보수
보수진영 대표하는 정당 장악해
무너진 보수 바로세우지 못하면
암울한 시간 계속될 수밖에
드디어 한국 정치 전면에 등장
거리에 머물던 아스팔트 보수
보수진영 대표하는 정당 장악해
무너진 보수 바로세우지 못하면
암울한 시간 계속될 수밖에
우리나라에서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을 극우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다. 극우라고 하면 당장 공권력으로 위장한 폭력 행사를 서슴지 않았던 군사독재 정권이 떠오르고 국가나 민족을 앞세운 전체주의인 나치즘, 파시즘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인사들을 ‘빨갱이’라며 탄압했던 과거와 보수 진영 사람들을 ‘극우’라고 비난하는 지금이 다를 게 없다는 주장도 그래서 나왔다. 이들은 극우라는 말 자체를 낙인찍기를 위해 만든 정치적 프레임으로 보고 극도로 경계한다.
그럼에도 우리도 이제 극우를 현실의 정치세력으로 인정하고 위상을 점검할 때가 됐다. 한국 정당정치의 주요 축인 국민의힘이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를 주장한 장동혁 신임 대표를 선출해 ‘반탄파’가 당주류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통일교 신도의 조직적 당원 가입 의혹을 수사하는 특검이 당사 압수수색을 시도하고, 12·3 비상계엄 동조 의혹과 관련해 개별 의원들에 대한 수사마저 예고돼 당내 강경파의 입지가 넓어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수십년 동안 한국식 양당제를 이끈 당이다. 주도 세력과 당명이 바뀌는 부침을 여러차례 겪었지만 헌법적 규범 안에서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노선을 유지해 수십년째 보수진영을 대표한 정당이다. 그런 당이 부정선거 음모론을 전파하고 헌법질서 파괴를 부르는 계엄을 옹호하다 보수의 기본가치마저 부정하는 자기모순적 상황에 놓였다. ‘아스팔트 보수’가 이미 주류가 됐는데 “극우는 낙인찍기”라는 말로 극우에 대한 논의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사실 극우나 극좌는 정치적 성향일 뿐이다. 한때는 시장을 얼마나 통제하려 하는가를 두고 좌우를 구분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념 대신 경제적 필요가 정부의 시장개입 정도를 결정한다. 구소련 해체 이전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추종 여부가 좌우의 기준이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의미가 없다.
다당제 전통이 확고한 유럽에서 좌우 구분은 정치적으로 유효하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정당들이 공존하는 정치시스템을 갖춰서다. 유권자는 정당의 성향을 분명히 알고 지지하거나 반대한다. 명확한 주장을 내세운 정당들이 다양한 합종연횡 끝에 연정을 구성하기에 유권자의 의사가 정책에 더 정확히 반영된다. 그런 시스템에서는 독일을위한대안(AfD), 국민전선(RN), 이탈리아의형제들 같은 극우정당조차 유권자를 대변하는 정당 중 하나일 뿐이다. 노골적인 인종주의가 우리에겐 몹시 불쾌하지만 그조차 그들의 시스템 안에서 해결할 문제다.
우리의 정치지형은 다르다. 사회가 급속히 양극화되는 중이지만 여전히 제3의 정당은 성공하기 어렵다. 대신 유권자는 내부 개혁이라고 부르는 당내 노선투쟁을 선호한다. 그런데 어제 국민의힘 노선투쟁 결과 국회와 법원에 난입한 경력이 있는 아스팔트 보수에 근거를 둔 대표가 최종 승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전후해 등장한 아스팔트 보수는 국민의힘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중도적·합리적 보수층에게조차 배척받은 세력이다.
하지만 이들은 초기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한풀이성 시위를 딛고 무섭게 성장했다. SNS와 유튜브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이념적으로 단련됐다. ‘개딸’에 대한 반감은 반페미니즘으로 정교화됐고, 과도한 애국주의 성향은 유럽 극우정당의 반이민주의와 유사한 반중국, 반다문화주의로 이어졌다. ‘과거 운동권에 갇힌 민주당’에 대한 반감은 감정적이던 반공·반북·친미 노선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는 기존 보수진영의 부국강병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앞세운 극우 논리의 체계화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윤석열정부의 국정철학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넘어 지금의 계엄 불가피론과 탄핵 반대론으로 귀결됐다.
합리적 중도를 향해 외연을 확장하며 보수진영을 대표했던 정당이 극우에게 포획된 현실은 암울하다. 어느 당이든 강경파는 정치참여에 적극적이니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이들이 승리한 건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장 신임 대표가 이끌 국민의힘의 미래다. 똘똘 뭉쳐 ‘반 이재명’ ‘반 민주당’을 외치는 선명성 확보로 시간만 보낼까 걱정이다. 극우 노선 대신 무너진 보수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세우지 않는다면, 마음이 떠난 중도 보수층을 돌아오게 할 행동에 곧바로 나서지 않는다면 암울한 시간은 한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