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비로소 갖게 된 문화의 힘

입력 2025-08-27 00:37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1947년 백범일지에 적었던 소원은 80여년 만에 현실이 됐다. 일제 식민 지배를 막 벗어나 먹고사는 문제에 치였을 시절에 문화를 이야기한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 전 세계인에게 가장 ‘힙한’ 나라가 어디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한국을 꼽을 것이다. 음악과 영화, 드라마 모든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우리가 비로소 갖게 된 문화의 힘이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최근 서울 곳곳에서 체감한다. 취재차 종로구 삼청동에 갈 일이 잦은데, 6~7년 전과 비교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 뜨문뜨문했던 대여 한복 차림의 외국인 경복궁 관람객이 요즘엔 바글바글하다. 북촌 한옥마을이나 명동 거리 등 관광지에도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북적이는 인파의 상당수가 외국인이다. 얼마 전 평일 오전 취재차 용산을 지나던 길에도 놀랐다. 도로 일부 구간이 꽉 막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기 위해 수백m가량 줄을 선 차량 행렬의 여파였다. 학창 시절 현장학습 때 봤던 썰렁한 박물관은 이제 상상하기 어렵다. 올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은 419만여명(25일 기준)으로 연간 최다 기록을 넘어 사상 첫 5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뒀다.

넷플릭스 최고 흥행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영향이 크다.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K팝과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등의 성공 덕에 제고된 국가 이미지가 케데헌으로 정점을 찍었다. 호의적 관심은 K관광, K푸드, K뷰티로 번지고 있다. ‘한국방문의 해’ 캠페인이나 역대 영부인들의 한식 알리기 같은 정부 차원의 노력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홍보 효과를 문화 콘텐츠가 일궈 낸 것이다.

구글 검색 트렌드에 따르면 지난주 전 세계 ‘한국(Korea)’ 키워드 검색량은 2년8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케데헌 공개일인 지난 6월 20일 이후 2배가량 뛰었다. 영화에 등장한 김밥, 컵라면, 국밥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한국 음식’ 검색량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늘었다. 관광객 유입 효과도 상당하다. 한국관광공사 집계를 보면 상반기 방한 외래관광객은 882만여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6% 증가했다. 실제로 서울 남산타워, 낙산공원, 청담대교 등 케데헌 등장 명소를 찾는 여행이 외국인에게 인기다.

미국이 제작한 케데헌을 바라보는 국내 콘텐츠 업계의 심정은 ‘부러움’이다. “케데헌을 우리가 제작할 순 없었나.” “뼈아프다.” 최근 정부 관계자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 책임자들이 산업 발전 방안 논의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글쎄, 우리가 만든 케데헌이 이만한 글로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외국인이 그들 시선으로 본 한국 문화의 매력이 담겼기에 더 큰 공감을 자아냈을 것이다. 화법이나 유머 코드의 미묘한 차이도 작용했을 터다.

우리가 할 일은 케데헌 부가효과를 기쁘게 누리는 한편, ‘케데헌 재탕’이 아닌 우리만의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공개석상에서 케데헌을 거듭 언급한 건 문화계 지원에 대한 강한 의지로 보여 반갑다. 방향도 옳다. 이 대통령은 18일 국무회의에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에 입각한 콘텐츠 지원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20일 케데헌의 매기 강 감독을 만나서도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정부가 할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을 꼭 지켜주길 바란다.

권남영 문화체육부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