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지노박 (3) 내 인생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늘 곁을 지켜준 어머니

입력 2025-08-27 03:05
뮤지션 지노박이 5살이던 1964년 서울 중구 자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지노박 제공

어머니는 내 인생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울며 집으로 달려가면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꼭 끌어안아 주셨다. 그 따뜻한 품은 세월이 흘러도 내 몸이 기억한다. 나는 종종 묻는다. ‘왜 나는 그토록 받기만 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당연하게만 여겼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시리고 눈물이 솟는다.

한창 어머니와 함께 대학병원을 찾아다니던 유년 시절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전주 예수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을 때 매일 항생제 주사를 맞느라 엉덩이는 멍투성이였다. 고통이 너무 싫어 종이에 간호사 얼굴을 그리고 연필로 마구 찌르며 분풀이했을 정도다. 수술 당일 간호사는 나에게 들것에 실려 갈지, 엄마 등에 업혀 갈지 물었다. 그 말이 어린 마음을 더 겁먹게 했다. 결국 어머니가 나를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셨다. 숨을 헐떡이며 한 계단씩 오르던 어머니 등 위에서 나는 비로소 울음을 멈추고 안정을 찾았다.

회복실에서 깨어났을 때 두려움에 울음을 터뜨린 내게 간호사는 “계속 울면 엄마 안 오셔”라며 겁을 주었다. 그러나 그 말은 오히려 내게 확신을 주었다. ‘그래, 내겐 엄마가 있잖아.’ 그 순간 두려움은 잠잠해졌다. 어린 내가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엄마의 존재’에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피아노 대회를 나가면 늘 상을 탔다. 피아노 학원 원장 선생님은 부모님께 조언했다. “이 아이는 국내에서 배울 아이가 아닙니다. 빨리 큰 스승에게 보내야 합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위해 수소문했고, 마침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교수로 계신 아버지 친구를 찾았다. 어릴 적 나의 음악적 재능을 알고 있던 그분은 나를 자녀처럼 잘 돌보고, 좋은 음악학교까지 진학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부모님도 내가 장애의 벽이 낮은 미국에서 더 큰 음악적 성장을 이루기를 바랐다. 비자까지 발급받고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을 때 어머니가 조용히 물으셨다. “엄마랑 떨어져도 잘 살 수 있겠니.” 그 순간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어머니도 함께 울며 나를 끌어안으셨다. 결국 나는 가지 못했다.

가끔 생각하곤 했다. ‘만약 그때 미국으로 갔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클래식 연주자가 되었을까.’ 확실히 아는 건 그때 그 순간에도 어머니의 선택은 ‘아들의 재능’이 아닌 ‘아들의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내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저 평범한 아들로 살아주기를 바라셨을 뿐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단순한 모성애에 머무르지 않았다. 내가 방황할 때면 무릎 꿇고 기도하셨고, 내가 믿음을 떠나려 할 때마다 눈물로 하나님께 매달려 나를 붙들어 달라 간구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꺾이지 않고 서 있는 것은 어머니의 믿음 덕분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곁을 지켜준 또 하나의 버팀목, 그것이 어머니의 기도였다. 부족함을 덮어주고 연약함을 일으켜 세운 힘의 근원에는 늘 그 눈물이 있었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