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우리의 몸은 안보 자산이다

입력 2025-08-26 00:37

몸의 작동 방식은 비슷하지만
생체정보는 완벽히 구분 가능

개인정보 문제로 여기면 안 돼
악용 시 안보 문제 가능성 있어
일부 국가 데이터 유출에 민감

유출 등의 위험성 막기 위해선
명확하고 강력한 규제 필요해

인간의 신체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피부나 눈, 머리칼의 색이 저마다 다르고 평균 신장 등도 인종에 따라 꽤 차이가 있지만 작동 메커니즘은 거의 동일하다. 인종과 성별, 지역의 차이를 무시해도 될 수준이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감기 증상이 있을 때 먹는 약의 성분은 같고 피부에 상처를 입었을 때의 처치 방법도 다르지 않다. 미국인이 먹는 약은 아프리카인도 먹을 수 있고, 한국의 수술 기법은 유럽에서 태어난 이들에게도 문제 없이 적용된다. 특정 질병에 대한 신약을 개발하면 전 세계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신체의 작동 메커니즘은 놀랄 만큼 흡사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신체는 개별적으로 완벽히 구분된다. 지문과 홍채 등 개인 인식 시스템에 활용되는 생체 정보는 복제가 어렵고 도난·분실의 위험성이 현저히 낮다. 특정 인종에서만 나타나는 유전체의 특징도 있다. 한국인의 80~95%가 체취 감소 유전자(ABCC11 변이)를 보유해 서양인 등 다른 인종에 비해 체취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른 인종에 비해 항경련제(카바마제핀)나 통풍 치료제(알로퓨리)의 부작용 위험이 높다는 약점도 있다. HLA-B1502 변이와 HLA-B5801 변이라는 약물 부작용 유전자가 다른 인종보다 한국인에게서 더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신체 작동 메커니즘을 연구하든 특정 인종의 유전체 특성을 연구하든 중요한 과제는 데이터 확보다. 어떤 산업에서든 중요하지 않은 데이터는 없지만 중요성 끝판왕은 인간의 유전체 등 생체정보 데이터다. 수많은 바이오 기업과 정부가 생체정보 데이터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까닭이고, 상당수 국가가 자국민의 생체정보 유출에 극도로 민감한 이유이기도 하다. 비영리단체인 팬데믹행동연합(PAN)은 지난 1월 보고서에서 “테러리스트나 반란 국가 등이 DNA 데이터를 내려받아 병원균을 만드는 데 악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실제 특정 인종이나 일부 지역 특성에만 작동하는 병원균을 개발한다면 엄청난 무기가 된다. 특정 인종이 특별히 취약한 질병에 대한 백신이나 약물을 개발해도 그 인종이나 국가에 대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한국인이 취약한 질병에 대한 백신을 타국이 개발한다면 그 나라는 우리에게 이른바 ‘갑’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일부 국가는 생체정보를 안보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미 법무부는 지난 4월 중국·러시아 등과는 유전체 데이터 등의 거래를 금지하거나 엄격히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연구 목적이라도 자국민의 유전체 정보 반출은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바이오뱅크 사업으로 50만명 이상의 자국민 유전체 데이터를 확보한 영국은 올해 들어 자국민의 생체정보 데이터를 제한된 기간 동안만 보관하도록 관련 법을 개정했다.

우리나라도 생체정보 데이터 확보를 위해 ‘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을 시행 중이다. 확보한 데이터를 AI 기술과 연계해 신약 개발이나 질병 예측 연구 등에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장점은 임상과 연계된 데이터가 정확하고 방대하다는 데 있다. 개인의 처방과 치료 이력 데이터는 한국인의 유전체 특성에 맞는 신약 개발은 물론 인류 공통의 신체 매커니즘 연구에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산업 경쟁력보다 더 중요한 건 생체정보가 민감한 개인정보이면서 국가 안보에 중요한 자산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난 4월 청소년을 대상으로 홍채 정보를 제공하면 현금 등을 준다는 마케팅이 확산됐을 때 서울경찰청은 ‘긴급 스쿨벨’을 발령했다.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생체정보 유출은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단돈 몇 만원을 받고 제공한 홍채 정보가 향후 국가적 기간 시설의 보안을 무력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생체정보를 개인정보로만 인식하는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생체정보의 중요성을 알리고 유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체정보를 활용하는 모든 기업·기관에 데이터 수집과 저장·분석 과정을 공개하도록 하고, 데이터의 해외 반출과 관련해선 명확하고 강력한 법적 규제도 마련해야 한다. 우리 몸에 대한 정보는 개인은 물론 국가에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몸은 대체 불가능한 안보 자산이다.

정승훈 논설위원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