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감독 로만 폴란스키, 2003)는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방송국에서 유대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이 프레데리크 쇼팽의 녹턴 20번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쇼팽이 ‘피아노로 부르는 노래’라고 칭했던 녹턴의 고요를 깨고 2차 세계대전의 폭격이 엄습해 왔다. 나치 독일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기습 침공한 것이다. 쇼팽의 녹턴으로 설명되는 평화와 고요는 부서졌고 더는 노래할 수 없는 시간을 만난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굶주림과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음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굶주림에 스필만은 피아노를 헐값에 팔아넘겨야 했고 그냥 카페에서 궁여지책의 연주를 했는데 더는 노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바르샤바를 점령한 후 1940년 11월부터 폴란드 유대인을 강제거주구역인 게토로 이주시켰는데 매달 5000~6000명이 질병과 총격으로 죽었고 심지어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후에는 대부분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다. 스필만의 가족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였기에 스필만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오히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비굴하고 비참한 삶이었다. 그때부터 그에게 음악은 더욱 의미가 없었다. 스필만에게 음악은 사치스러운 것이었고, 더는 연주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며, 무감각한 이유가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 적은 것처럼 ‘무감각’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삶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와 유사했다. 그들은 모두 노래하기 위해 쓰던 수금을 나뭇가지에 걸었고 노래하는 입을 다물었다. 가슴에 찬 슬픔 때문이었다. 바벨론, 즉 그들을 침략했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했지만 그들은 부르지 않았다. 스필만에게서 노래가 사라진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한 것처럼 엄청난 홀로코스트의 참혹을 경험하고 있는 스필만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렇게 오로지 생존하던 어느 날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굶주림으로 지내던 스필만이 통조림 하나를 발견하고 몰래 숨어 먹으려고 하다가 누군가 치는 쇼팽의 녹턴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녹턴을 연주했던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누구인지를 묻는 독일군 장교에게 피아니스트라고 밝힐 수밖에 없었고 그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연주해야 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에 강요했던 바벨론의 요청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스필만은 바벨론 강가에 수금을 걸어놓은 이스라엘처럼 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 연주해야 했다. 그때 스필만이 연주한 것이 쇼팽의 발라드 1번(Ballade NO.1 in G minor Op.23)이었는데 쇼팽이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에 반대해 고국을 떠나 오스트리아 빈에 체류하던 중 만든 곡으로 조국에 대한 격렬한 사랑과 러시아에 대한 분노가 숨어있는 곡이었다. 차분하게 시작하지만 강렬한 연주로 이어지는 곳에 그같이 숨겨진 분노가 있었다. 그러므로 스필만이 이 곡을 연주한 것은 비록 목숨을 위한 연주였지만 그 죽음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분노였고 자신이 살아있는 모습을 연주한 것이었다.
우리 크리스천도 다른 의미에서 교회의 문화와 삶을 해체하고 세상화하는 현실을 만났다. 그리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이 사실이다. 바벨론 강가에서 수금을 걸어놓은 이스라엘과 달리 심지어 세상이 요구하는 연주를 교회와 크리스천이 하는 변질을 만난 것이다. 복음이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왜곡되고 변질한 복음을 연주하는 것이다. 최소한 영화 속의 스필만처럼 다른 노래,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노래를 연주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윤동주가 그립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를 묶어놓았을 때 오히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한 윤동주 말이다. 이 세상에서 다른 노래를 부르는 사람 말이다.
하정완 목사 (꿈이있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