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수룩한 머리에 자판기 커피를 입에 달고 다녔다. 석사 마지막 학기였던 P형은 늘 잠이 부족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대학원 실험실을 드나드는 학부생 후배들을 만날 때는, 실험 결과를 놓고 얘기를 나눌 때는 눈빛이 반짝였다. P형은 미국에서 박사, 포닥(postdoc·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교수로 눌러앉았다. 그는 종종 말했었다. “한국에서 이공계, 특히 기초과학 연구원은 설 자리가 좁아. 유학을 가서 눌러앉든지, 교수 자리를 노리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일찌감치 취업해라.”
얼추 30년 된 얘기인데, 지금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아니, 현재 상황은 더 좋지 않다. 학사로 졸업해 취업하거나 학부과정 중간에 의대로 갈아타는 사례가 많다. 대학원 석사 지원이 줄고 있고, 박사를 딸 거면 아예 해외로 나간다.
숫자로 보면 확연하다. 올해 1학기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박사 통합과정 경쟁률은 1.21대 1에 그쳤다. 2023년 2학기 1.63대 1 이후로 내리막이라고 한다. 지난해 카이스트를 비롯한 4대 과학기술원 가운데 일부는 신입생 입학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3~2022년) 이공계 학생 34만명이 한국을 떠났다. 이 가운데 석·박사는 9만6000명이나 된다. 2010년대 초반엔 이공계 졸업생 중 20%가량이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2023년에는 11.3%로 낮아졌다.
2040년부터 이공계 대학원 입학생이 줄기 시작해서 2050년에 상위 20개 안팎 대학을 빼고는 대학원생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예측도 나온다. ‘이공계 인재절벽’의 전조가 쌓이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곧 국가경쟁력이고, 기술패권이 국가 미래를 결정하는 시대에서 인재절벽은 심상찮은 징후다. 더욱이 한국은 전통적 성장 공식의 한계에 부딪혔다. 선도국가로 퀀텀점프를 이뤄줄 엔진은 과학기술이고 연료는 이공계 인재인데, 연료통이 비고 있다.
우리 모두 원인을 안다. 첫손에 꼽히는 건 ‘손해 보는 선택’. 석사 2년, 박사 4년을 연구실에서 보냈는데 경제적 손해가 크다. 과학기술 분야 정부 출연 연구기관 25곳의 평균 연봉은 9000만원 수준이다. 박사의 초임 연봉은 4000만원 정도. 미래 고용 불안정, 석·박사 과정 때 생활비 부담 등도 덧붙는다. 반면 전공의 평균 연봉은 7000만원이고, 전문의는 2억3000만원가량 된다. 이러니 다들 의대, 의사 하는 거다. 주말도 없고 밤샘을 밥 먹듯 하는 근무시간, 자율·창의성을 꺾는 연구 환경은 덤이다.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대학원생이 연구, 인턴십, 창업을 병행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대로라면 기초과학부터 응용기술까지 붕괴로 가는 연쇄반응을 겪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증폭하고 반응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는 게 연쇄반응의 특징이다. 전략산업 경쟁력이 추락하고, 수입 기술에 의존하면서 기술주권과 국가안보는 무너지게 된다. 영원히 추격자에 머물게 된다. 이공계 대학원 기피가 개인 선택에 그치지 않고, 국가 생존의 위기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다. 여전히 과학자를 꿈꾸는 청년들이 있다. 과학으로 성공한 이들도 아직 있다. 말총머리에 개량 한복을 입고 입학했던 학과 후배 L은 기나긴 연구원 생활을 발판으로 꽤 이름 있는 바이오제약회사를 창업해 증시 상장까지 했다.
이제라도 청년들이 꿈을 꺾지 않도록 서둘러 밑바탕을 다져야 한다. 마침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주재하고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을 존중한 나라는 흥했고, 천시한 나라는 대개 망했다”면서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했다. 이번 한 번에 그쳐서는 안 된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