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지노박 (2) “나의 연주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입니다”

입력 2025-08-26 03:04
뮤지션 지노박이 2023년 경기도 김포에 있는 개인스튜디오에서 아끼는 키보드를 옆에 두고 앉은 모습. 지노박 제공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지금까지 기억이 생생한 장면이 있다. 함께 피아노도 배우며 숙제를 나누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과 마음씨도 곱던 그 친구는 내 피아노 연주를 칭찬하며 늘 곁을 지켜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무심코 건넨 한 마디가 내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로 새겨졌다. “넌 피아노도 잘 치고, 유머도 있고 용감하고 정말 다 좋은데…. 다리를 저는 게 너무 아쉽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열 살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절망이었다. 이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다. 건강한 친구들을 보면 알 수 없는 분노도 치밀었다. 그 날 그 한 마디는 이후 내 방황의 작은 불씨가 됐던 것도 같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의 약함보다 먼저 드러난 것이 있었다. 바로 음악적 재능이었다. 어릴 때부터 절대음감에 가까운 감각을 가진 나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곡조를 자유롭게 변주하며 연주하기를 즐겼다. 학원에서도 ‘자유로운 연주’로 늘 주목받았다. 집에 돌아오면 팝송과 재즈를 즉흥적으로 풀어내며 나만의 음악 세계를 마음껏 누렸다. 남이 만든 악보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건 내겐 단순한 손가락 연습으로 여겨졌다. 귀에 들리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음악이라고 믿었다.

나는 귀로 들은 멜로디를 악보 없이 연주했다. 드라마 주제곡이나 만화영화 노래를 피아노로 들려주면 아이들과 어른들이 금세 내 주위에 모였다. 건반 앞에 앉으면 사람들의 눈빛은 달라졌다. 찬송가 한 곡만으로도 눈시울을 적시는 어른들을 보면서, 어린 나도 음악이 가진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의 목회 현장에서 한 목사님이 나를 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참 이상하네요. 사고뭉치 같은 저 아이 안에 기름부음이 느껴지네요.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따로 준비하신 아이 같습니다.” 그때는 흘려들었지만, 훗날 돌아보니 하나님의 예언 같은 말씀이었다.

세월이 흘러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음악은 내 삶의 중심이었다. 지역 공연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며 연주했고, 대규모 콘서트 무대에도 섰다. 로스엔젤레스 슈라인 오디토리움에서 수천명 앞에 선 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박수와 환호가 쏟아진 감격스러운 공연 뒤 형이 건넨 짧은 말이 내 마음을 깊이 흔들었다. “연주는 훌륭했어. 그런데 무대에 오를 때 조금 더 당당했으면 좋겠다.”

그 말은 불편한 다리를 여전히 부끄럽게 여기던 내 모습을 직면하게 했다. 내가 가진 음악적 달란트를 사랑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나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갔다. 장애를 숨기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로 품는 법을 배운 것이다.

지금의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은 내게 음악이라는 은사와 함께 불완전한 다리를 통해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까지 심어주셨다. 약함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덕분에 내 연주는 단순한 음악을 넘어 위로와 소망이 되었다. 이제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까지도 사용하셔서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는 ‘은혜의 선율’로 바꾸신다는 것을.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