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청계산과 대모산을 뛰어다니며 등반하던 한 건축사가 있었다. 재력도 있고 건강에도 자신 있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 검진 후 간암 3기 진단을 받고 회복에 힘썼으나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건강에 자신한 나머지 간암이 생기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간암은 대부분 조용히 다가온다. 특별한 증상도, 통증도 없다. 체중이 줄거나 피로감이 심해져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쉽다. 그래서 간암은 발견됐을 땐 치료가 어려운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암에 ‘침묵의 살인자’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의학은 이제 침묵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몸속 어딘가에서 보내는 미세한 경고는 바로 알파태아단백(AFP)이라는 단백질이다. AFP는 원래 태아의 간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이다. 태아기에는 혈액 속에 높은 농도로 존재하지만 출생 후에는 급격히 감소해 성인이 되면 거의 검출되지 않는다. 성인의 몸에서 AFP 수치가 다시 상승한다면 이는 간세포가 비정상적으로 퇴행한다는 신호일 수 있다. 간세포가 정상 기능을 잃고 유전적 이상을 겪으며 암세포로 변이되기 시작하면 AFP가 생성된다. 이것이 간암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
AFP는 혈액 검사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상 수치는 보통 10ng/㎖ 이하다. 만성 간염이나 간경화를 앓는 이가 AFP 수치가 점차 상승하면 간세포가 암으로 전환되는 징후로 볼 수 있다. 특히 200ng/㎖ 이상이 지속되거나 400ng/㎖를 넘는 경우엔 영상 검사에서 병변이 보이지 않더라도 간암을 강하게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B형 또는 C형 간염 환자나 간경화 진단을 받은 고위험군은 6개월마다 AFP와 간 초음파를 병행해 검사받는 것이 표준 예측 전략이다.
물론 AFP만으로 간암을 진단할 순 없다. 간염이 심하거나 간에 염증이 있을 때도 수치가 올라갈 수 있다. 초기 간암 중 일부는 AFP가 정상일 수도 있다. 따라서 AFP 외에도 피브카 2(PIVKA-II)를 함께 측정해 정확도를 높인다. 이는 간세포가 비정상적인 단백질을 합성할 때 증가하며 AFP가 정상이라도 PIVKA-II가 높으면 간암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다.
간암은 예측의학이 특히 중요한 질환이다. 증상이 없어도 정기적으로 AFP와 초음파를 확인하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시작점이다. 간암은 조기에 발견하면 수술이나 고주파 열치료, 간동맥 색전술 등 다양한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늦게 발견하면 치료 선택지가 매우 제한적이다.
최근엔 손상된 간세포를 회복시키는 재생의학의 접근도 주목받고 있다. 특히 줄기세포 기반 치료는 간 기능을 유지하거나 회복하는 데 의미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줄기세포 치료는 현재 간경화나 만성 간손상 분야에서 주로 연구한다. 간암 자체를 직접 치료하는 방식은 아직 임상적으로 확립되진 않았다. 그러나 줄기세포는 세 가지 주요 경로로 간 기능 회복과 암 발생 위험 감소에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첫째, 손상된 간세포를 대신할 수 있는 세포를 생성해 전체 기능을 유지하고 섬유화 진행을 늦춘다. 둘째, 중간엽 줄기세포는 면역조절 작용으로 과도한 염증 반응을 억제하고 간경화를 막는 데 도움을 준다. 셋째, 줄기세포는 간 조직 내에서 성장인자와 사이토카인, 엑소좀 등을 분비해 기존 세포의 회복을 돕고 조직 환경을 개선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줄기세포 치료는 현재 초기 임상연구 단계에 있다. 직접적인 항암 효과보다는 간 기능 유지와 질환 악화 억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간암 표준 치료는 여전히 수술과 고주파 열치료, 표적항암제와 면역항암제, 간이식 등이다. 그렇지만 줄기세포 기반 전략은 치료를 받기 어려운 환자의 간 기능을 유지하고 회복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간암 치료에서 예측의학과 재생의학은 함께 작동한다. 간암을 조기에 알아채는 예측의 눈과 망가지기 전에 회복할 수 있다는 재생의 가능성은 지금 우리가 가진 중요한 의학적 무기다. 병을 미리 감지하고, 회복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조용한 단백질의 신호와 살아 있는 세포의 가능성이 있다.
선한목자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