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회자 가정의 막내아들이었다. 부모님에겐 나 전에 큰딸과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중 큰딸을 유아기에 사고로 떠나보냈다. 큰누나의 빈자리가 늘 마음에 남아 있던 부모님은 네 번째 아이가 딸이길 소망했지만 태어난 건 막내아들인 나였다. 그리고 생후 8개월, 나는 소아마비를 앓으며 한쪽 다리에 장애를 입게 됐다.
어머니는 그런 막내아들이 평생 뒤처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네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하셨다. 노동이나 달리기는 힘들어도, 음악이라면 길이 열릴 수 있을 거라 믿으셨던 것이다. 내 걸음걸이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것도 어머니였다.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 자꾸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나를 보고 단번에 이상함을 감지하셨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나를 업고 전국의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다니셨다. 3년 반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정성과 그 사랑이 나를 ‘걷는 아이’로 세워주었다.
하지만 걷는다는 것이 곧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또래 아이들이 힘차게 뛰놀 때, 나는 뒤뚱거리며 쫓아가기 바빴다. 놀림과 조롱은 어린 마음을 깊이 찔렀다. 친구들처럼 달리고 싶다는 소망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눈물 어린 기도가 되곤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쉽게 화를 내곤 했다. 다리를 들어주려던 친구에게 괜히 화를 내거나, 놀리던 아이들을 붙잡아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내 안에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자격지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청년이 되어 이성을 만나 데이트할 때조차 나는 상대방 앞에서 마음 편히 걸어본 적이 없었다. 장애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혹여 상대가 불편해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긴장을 풀지 못한 탓에 온몸이 쑤시곤 했다. 그런데도 결국 상대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다 아는 사실이었어.” 아무리 애써 숨기려 해도, 내 다리의 불편한 흔적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며칠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분명 속상하고 외로웠다. 가장 힘든 시간을 홀로 보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나의 불편한 다리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의 부족함을 부끄러움으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이웃을 향한 공감과 사랑으로 바꾸어 주셨다.
내가 약할 때 주님은 강하셨다. 나의 부족함을 끌어안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 나 역시 소외되고 아픈 이웃을 향해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 약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나를 ‘독립군’이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했다. 놀림과 외로움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은 분명 힘겨웠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것이 오늘 나를 세우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었음을. 연약함 속에서 자라난 사랑과 공감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나의 ‘역경의 열매’다.
△1959년 서울 정동 출생 △제24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재즈뮤지션대상’ 수상 △세종특별자치시홍보대사, 김포시홍보대사 △에버그린 팝스오케스트라 예술감독 △East West Church in GA 파송 찬양선교사 △김포 삼보장로교회 음악선교사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