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권사 형제들·구연영 전도사 부자, 의병 활동 펼치다 순국

입력 2025-08-25 03:07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일어났고 그중엔 기독교인들도 참여하면서 일제에 의해 희생됐다. 사진은 당시 의병들 모습. 국민일보DB

1885년 8월 3일 HG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 정동의 사택 두 칸을 교실 삼아 학생 2명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신학문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학생 수는 점차 증가했고 이듬해에는 20명이 넘었다. 고종 황제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과 함께 현판을 하사했다.

서울 정동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모습으로 1916년 준공된 배재학당 동관이다. 국민일보DB

1966년 8월 3일 대한성서공회는 파월 백마부대에 성경 3000권을 기증했다. 당시 대한성서공회는 베트남전 파월 장병들을 위한 성경 보급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1984년 8월 5일 한국 기독교 20개 교단장과 총무들은 연석회의를 열고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을 공동 성명으로 발표하고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했다. 당시 전 대통령은 그해 9월 6일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3차례, 1961년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방미 길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모두 비공식 방문이었다.

1903년 8월 7일 홍승하 등 미국 하와이 한인들이 신민회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등 주로 감리교 출신 인사들과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단체로, 미주 최초 정치적 성격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신민회는 단순히 이민자들의 친목 도모를 넘어 구국정신을 고취하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며 동족의 단결 등의 목적이 있었다.

1897년 8월 13일 독립협회가 조선 개국일 기념식을 개최했다. 기념식에서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에 대한 주한 외국인의 의무(The Obligation of Foreign Residents to Korea)’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 대한 외국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1976년 8월 18일 NCCK 및 각 교단이 북한의 도끼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도끼만행 사건은 이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이 도끼와 곡괭이를 휘둘러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한국군과 미군 장병들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1995년 8월 21일 곽선희 당시 소망교회 목사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 초청으로 황해도 장녕군과 북한 의료시설, 교회를 방문했다. 곽 목사의 방북은 조그련 중앙위원회 강영섭 위원장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방북 목적은 북한 기독교계 시찰과 선교 협력 방안 논의였으며 소망교회가 추진하고 있던 치과병원 건립에 대한 협의도 포함돼 있었다. 곽 목사의 북한 방문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 종교인 방북이었다.

1907년 8월 21일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인 의병 활동이 일어났고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면서 수많은 의병과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강화도 의병들은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를 중심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의병들은 8월 10일 갑곶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나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졌다. 김동수 권사 형제는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던 중 강화도 갑곶나루 근처 해안가에서 참수됐다. 감리교 구연영 전도사와 그의 아들 구정서는 8월 24일 경기도 이천 장터에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구 전도사는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의병장으로 이후 기독교에 귀의해 전도사로 활동했다. 한편 당시 선교사들은 기독교인들의 의병 활동에 반대했다. 게일의 경우 “미친 듯한 사이비 애국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헐버트처럼 항일운동에 직접 참여한 선교사도 있었다.

1903년 8월 24~30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남감리교 선교사 화이트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맥컬리 2명의 여선교사가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 가운데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원산 부흥 운동의 불씨가 됐다. 기도회는 더 확산하면서 7명의 원산 주재 선교사들이 의료 선교사였던 로버트 하디를 주 강사로 ‘연합성경공부 및 기도회’를 열었다. 하디는 기도회에서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눈물로 회개했다. 민족적 우월감, 자기 능력 학식 실력에의 의지, 한국인 무시 등을 고백했다.

원산 부흥운동의 시초가 된 로버트 하디 선교사. 국민일보DB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 반포로 기독교학교들이 크게 위축됐다. 사립학교령은 한국인의 교육 자율권을 빼앗고 일제에 순종하는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식민지 교육 통제 법규였다. 사립학교령에 따르면 사립학교를 설립할 때 학부대신(일본인 통감)의 인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재정, 교원, 교과서 등 설립 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만들어 신규 학교 설립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또 1915년 3월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을 통해 일본어 사용과 종교교육 금지 조항이 추가됐다.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수 없었고 미션스쿨 본래 설립 취지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사립학교령 공포 이후 기존 사립학교는 6개월 이내에 재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재정적 어려움이나 인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많은 민족 학교들이 폐교됐고 기독교 학교들은 교육의 자유를 침해당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했다(경술국치). 앞서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는데 조약 1조는 대한제국 통치권이 ‘완전히 또는 영원히’ 일본으로 넘어간다는 내용을 담았다. 경술국치는 수년간 이어진 일본의 침탈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됐으며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당한 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잃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