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폭염에 美 캘리포니아 전력 위태
수많은 배터리 전력 모아 위기 극복
소비자, 생산자로 바꾼 건 AI 기술
세계 다양한 가상발전소 구축 경쟁
수많은 배터리 전력 모아 위기 극복
소비자, 생산자로 바꾼 건 AI 기술
세계 다양한 가상발전소 구축 경쟁
이번 여름 기록적인 폭염으로 곳곳에서 전력망은 큰 위기를 맞았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에어컨 사용 급증으로 전력 수요가 폭발해 공급이 위태로워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의외의 해결사가 등장했다. 바로 집에 설치된 배터리였다.
전력망이 위기에 몰린 순간 사람들은 가정용 배터리에 저장한 전기를 일제히 방출했다. 실제로 집에 설치된 테슬라의 파워월은 지난달 29일 하루 동안 수만 ㎾h의 전기를 공급했으며, 2시간 동안 평균 535㎿를 투입했다. 참여 방법도 간단했다. 전용 앱을 통해 AI 기반 가상발전소(Virtual Power Plant·VPP) 프로그램에 가입만 하면 된다. VPP에 수많은 가구가 등록했고, 각 가정의 작은 배터리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발전소처럼 작동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전기를 내준 사람들은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전기요금을 걱정하는 대신 전기를 팔아 돈을 번 것이다. 폭염이 만든 위기는 기회가 됐고, 사람들은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신하는 법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 모두는 AI 기술과 접목해 가능하다.
가정의 전기로 돈 버는 비결
미국 워싱턴주로 가보자. 미국 굴지의 전력회사 퓨젯사운드에너지(PSE)는 AI 기업과 손잡고 또 다른 형태의 VPP를 운영하고 있다. PSE는 AI 플랫폼을 활용해 고객들이 전기를 절약할 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수요 반응형 프로그램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단순히 기술 중심이 아닌 인센티브를 통해 고객의 행동 변화를 이끌고 있다. 또한 AI 플랫폼을 활용해 스마트 온도조절기나 전기온수기를 설치한 고객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더 많은 가정이 VPP에 참여토록 하고 있다. 이 플랫폼은 예측 정확도 97% 이상을 자랑하며, 여름철과 겨울철처럼 전력 수요가 급증할 때 AI 기반 예측과 제어를 통해 전력망 피크를 효과적으로 완화한다.
분산 에너지 자원(DER) 통합 관리
결과는 놀라웠다. 프로그램 출시 하루 만에 2000명 이상 가입했고, 전력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는 순간을 맛본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작은 참여가 모여 도시 전체의 전력을 안정시키고 고객 중심의 에너지 혁신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참여자가 늘어날수록 VPP는 더 커지고 강력해진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고객이 친환경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미래를 체험하고 있다. 이곳의 AI는 태양광 패널, 전기차 충전기, 스마트 온도조절기, 가정용 배터리 같은 분산 에너지 자원(Distributed Energy Resources·DER)을 통합 관리한다. 예측, 제어, 보상까지 모두 AI로 연결돼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인다. 각 기기의 전력 생산이 들쭉날쭉해도 이를 합치면 대규모 발전소처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해진다.
미래의 바람을 읽는 구글 딥마인드
구글 딥마인드는 AI로 바람의 미래를 읽는다. “바람이 언제 얼마나 불지 내일 아침 8시에 확실히 알 수 있는가?” 과거에는 이런 질문은 황당한 상상이었지만 이제는 AI의 힘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는 36시간 먼저 바람을 예측하고 동향을 읽는다. 구글은 미국 중부의 700㎿ 규모 풍력발전소를 대상으로 AI 기반 예측 시스템을 적용했다. 이 풍력단지는 한 도시가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전기를 생산한다. 기상예측 데이터와 과거 터빈 운전 데이터를 학습한 AI 신경망을 활용해 풍력 발전량을 예측한다. AI는 이렇게 예측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발전소의 공급 계획을 지원한다.
결과는 놀랍다. 풍력 에너지의 경제적 가치는 20% 증가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이 좋아졌다는 의미를 넘어 예측하기 힘든 바람을 스케줄 가능한 에너지원(schedulable energy), 즉 언제 얼마나 공급할 수 있는지 미리 약속할 수 있는 자원으로 바꿔버린 획기적인 성과다. 예전처럼 정해진 시간 약속 없이 전기를 공급하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각국 VPP의 특징
일본에서는 가상발전소가 재난 대응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태풍 등으로 송전선이 끊겨도 가정에 설치된 배터리가 전력을 공급해 정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작은 배터리가 모여 지역 전체의 회복력을 높여준 것이다. 독일의 지멘스는 도시 단위의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을 구축해 건물, 전기차 충전소, 태양광 패널 등을 시뮬레이션하며 전력 사용을 최적화한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셈이다.
스위스의 ABB는 건물 중심의 관리 모델에 초점을 맞춘다. ABB 에너지 자산 관리자(Energy and Asset Manager) 솔루션은 클라우드 기반 SaaS(Software-as-a-Service)를 통해 고객이 물리적 자산과 전기 시스템을 실시간으로 관리하고 최적화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AI 기반 빌딩 에너지 관리 시스템은 전력, 냉난방, 가스 사용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이상 패턴을 감지하면 경고한다. 이를 통해 에너지 비용을 최대 25% 절감하기도 했다.
다른 흥미로운 사례는 AI 에너지 예측 앱이다. 날씨와 과거 사용 데이터를 분석해 다음 날 전력 사용량을 예측하고, 사용자가 피크 요금 구간을 피해 에너지를 조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마치 건물에 스스로 전력 소비를 계획하고 절약하는 비서가 생긴 셈이다. 이처럼 구글, 지멘스, ABB, 그리고 일본의 사례는 공통된 시사점을 준다. AI와 VPP는 단순한 효율 향상을 넘어 미래를 예측하고 공동체의 안전과 회복력까지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이다.
미래의 VPP 전략
각국의 VPP 모델은 특성이 다르다. 미국 테슬라는 참여와 보상, 스위스 ABB는 개별 빌딩 효율화, 독일 지멘스는 개별 가정·건물이 아니라 도시 에너지 흐름의 최적화, 일본은 재난 대응력 강화를 위한 VPP 모델을 발전시키고 있다.
한전과 자회사 KDN은 단순한 전력 절약을 넘어 AI가 발전량과 전력 시장가격을 예측해 자동으로 처리하는 시장 연계형 VPP 모델을 구축 중이다. 우리나라도 국가 전력망을 AI 두뇌로 관리하는 자율적 지능 시스템으로 만들고자 한다. AI 기술 덕분에 전력망은 스스로 판단하고, 생산하며, 최적화하는 지능형 전력 시스템으로 진화할 것이다.
미래는 더 이상 전력을 단순 소비하는 시대가 아니다. 결국 AI-VPP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미래의 새로운 에너지 질서를 창조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머지않아 우리는 전기요금 고지서 대신 ‘이달의 전력 판매 수익 증서’를 받는 날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 무대 뒤에는 언제나 AI의 보이지 않는 두뇌가 조용히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위기를 기회로 포착하고 창조적 아이디어와 역발상으로 AI를 활용하는 지혜와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현덕 KAIST-NYU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