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유명 영어유치원을 졸업한 아이의 부모 A씨는 아이가 한국인 정체성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 걱정이 크다. A씨 자녀의 경우 미국의 50개 주는 달달 외우지만 한국의 지명은 거의 알지 못한다. A씨는 21일 “영어를 잘했으면 하는 생각에 영어유치원에 보냈지만 미국 역사와 문화에만 익숙한 아이의 모습이 달갑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국회에서 ‘영어유치원 금지법’이 발의되는 등 영어유치원 열풍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한 가운데 하루 대부분을 영어에 노출된 채 생활하는 아이들의 정체성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내 영어유치원은 대부분 미국 현지의 초등 정규 교재를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Wonders’는 미국 공립학교 채택률 상위권을 차지하는 교재로 강남 일대 영어유치원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신 연구를 반영해 2010년대 후반에 출간된 교재도 주로 사용된다.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모국어를 접할 시간은 제한적이다. 오후 3시쯤 하원해 집에 돌아온다 해도 영어유치원 숙제가 있다. 한국어 교육을 하려면 국어 학원에 보내거나 부모가 저녁에 한글책을 읽어주는 식의 보완 노력을 해야 한다. 학부모 B씨는 “이미 학원에 다녀와 지친 아이를 붙잡고 한글을 가르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 영어유치원 교육 정보 커뮤니티에는 “아이가 일반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보다 한국어가 뒤처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며 “보완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아 고민”이라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걱정이 앞서지만 영어유치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유치원 이후 영어 교육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영어유치원은 만 7세에 들어갈 수 있는 대치동의 유명 영어학원 입학을 위한 필수 코스다. 이들 학원 합격자 수에 따라 영어유치원 서열이 나뉘기도 한다. 일부 영어유치원은 ‘4세 고시’로 불리는 선발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 영어유치원은 2019년 615곳에서 2023년 842곳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조기 이중언어 환경은 아이의 사회적·정서적 능력이 충분히 형성되기 전에 지나친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발생한 심리 장애로 병원을 찾는 아이들도 많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기개념을 형성하는 시기에 혼란이 발생하는 등 아이의 스트레스가 커질 수 있다”며 “영어유치원에 집착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영어유치원이 조기 사교육을 심화한다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학원단체에서도 자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학원총연합회 전국외국어교육협의회는 이른바 ‘4세·7세 고시’로 불리는 입학시험을 시행하지 않는 등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협의회는 “선착순이나 추첨 등의 방식으로 원생을 모집하도록 권고했다”며 “영어유치원이라는 명칭을 쓰는 일부 학원에 다른 명칭을 사용하도록 지침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