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1685~1750)와 헨델(1685~1759)은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다. 두 사람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지만, 바로크 시대의 악기는 오늘날 사용하는 악기와 달라서 작곡가의 의도를 제대로 담았다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바로크 시대 건반 악기인 하프시코드(쳄발로)와 18세기 후반부터 일반화된 피아노는 소리를 내는 방식부터 다르다. 하프시코드는 플렉트럼이라는 작은 돌기가 현을 뜯어 소리를 내지만, 피아노는 건반에 연결된 해머로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낸다. 무엇보다 하프시코드는 피아노와 달리 소리의 강약을 조절할 수 없다.
또 바로크 시대에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는 금속 현 대신 양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 현을 사용해 더 작고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관악기는 ‘키’(소리구멍 덮개)와 ‘밸브’(누름쇠)가 없어서 음정과 음량 조절이 자유롭지 않지만 악기 고유의 음색이 돋보인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이전에 있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바로크 음악을 통칭하는 고음악을 당대의 악기와 연주방식으로 재현하고 해석하는 것을 ‘시대 연주’, ‘역사주의 연주’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해 과거에 사용되던 ‘원전 연주’나 ‘정격 연주’는 다소 공격적인 어감 때문에 요즘엔 지양되는 분위기다.
국내선 유학파들이 만든 단체가 주축
시대 연주는 1950년대 유럽에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등을 중심으로 싹이 텄다. 당시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면서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접근 방식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다만 시대 악기에 대한 정보와 연주 기술 부족 등의 문제를 가진 데다 학문적인 접근에 머물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 연주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며 1980년대 이후 대중화에도 성공했다.
우리나라에 시대 연주가 소개된 것은 주로 1980년대 해외 음반을 통해서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 존 엘리어트 가디너가 이끄는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와 몬테베르디 합창단 등 시대 연주 단체들의 내한공연이 꾸준히 이어졌다. 2014년부터 고음악 분야의 연주자와 단체를 초청하는 ‘한화클래식’이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유학을 통해 고음악을 공부한 연주자들이 귀국하면서 시대 연주 단체들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2002년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김진이 창단한 국내 최초 고음악 단체 무지카 글로리피카를 시작으로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 바흐 콜레기움 서울, 바흐 솔리스텐 서울, 알테 무지크 서울,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 등이 만들어졌다. 이들이 스즈키 마사아키, 존 홀로웨이, 데라카도 료 등 거장들과 협업을 진행하고 꾸준히 공연을 올리면서 국내에서 시대 연주의 토착화 및 대중화가 진행됐다.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 20주년 콘서트
이제 시대 연주는 새롭지 않지만 올해 초가을에는 유난히 공연이 많다. 우선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이 오는 29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아폴론 앙상블과 함께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롯데콘서트홀의 축제 ‘클래식 레볼루션’ 예술감독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드 카바코스가 이끄는 아폴론 앙상블은 하프시코드가 포함돼 있지만 현악기의 경우 현대 악기를 바로크식 주법으로 연주한다. 일종의 절충주의적 연주인 셈이다.
반면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은 다음 달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영국 지휘자 겸 하프시코드 연주자 리처드 이가와 함께 헨델의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등을 시대 악기로 선보인다. 영국 고음악 아카데미를 15년간 이끌었던 이가는 2008년 내한공연 당시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과 인연을 맺었다. 2012년 LG아트센터 초청으로 함께 무대에 오른 후 이번에 13년 만에 20주년 기념연주를 함께한다.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의 리더인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는 22일 “시대 연주 또는 역사주의 연주는 역사적인 지식에 바탕을 둔 연주를 뜻한다. 영어로는 HIP(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엔 HIP의 I를 ‘영감을 받았다’(Inspired)는 의미로도 본다”면서 “과거에는 시대 악기로 옛 음악을 고증하고 재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대 연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처럼 시대 악기와 현대 악기를 대립된 개념으로 보지 않는 만큼 작곡가의 의도를 담으려는 다양한 시도까지 넓게 본다”고 설명했다.
또 지난해 바로크 첼리스트 조현근과 바로크 플루트 및 리코더 연주자 전현호가 설립한 이디오마 델라 무지카는 오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헨델 리코더 소나타 전곡 연주에 나선다. 규모는 작지만 바로크 실내악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무대다. 이어 지휘자 김선아가 이끄는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은 9월 3일 서울 심산아트홀에서 ‘비바 비발디’를 통해 바로크 작곡가 비발디의 작품을 탐구한다. 대중적인 곡 ‘사계’ 중 ‘여름’,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비롯해 기악 협주곡 양식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화성의 영감’ 중 바이올린 협주곡 6번을 들려준다. 프랑수아 페르낭데즈와 김윤경으로 구성된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듀오 ‘페르낭데즈 비올론스’도 함께한다.
바로크 합창을 전문으로 하는 르 보야즈 보칼레 앙상블은 시대 연주 단체인 더 뉴 바로크 컴퍼니와 함께 9월 12일 성남아트센터, 14일 부산 금정문화회관에서 바흐의 ‘마태수난곡’ ‘b단조 미사’, 헨델의 ‘메시아’ 등 바로크 명곡의 하이라이트를 들려준다.
거장 필리프 헤레베허 내한 큰 관심
뭐니 뭐니 해도 초가을 시대 연주 러시 속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9월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19일 대전예술의전당, 20일 아트센터 인천에서 열리는 필리프 헤레베허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b단조 미사’ 내한공연이다. 벨기에 출신인 헤레베허는 라 샤펠 르와얄, 상트 뮤직 아카데미, 샹젤리제 오케스트라 등 여러 시대 연주 단체와 축제를 설립하거나 예술감독을 역임한 거장이다. 그는 시대 악기로 고전주의, 낭만주의 음악까지 연주하는 등 시대 연주의 범위를 확장했다.
올해 창단 55주년을 맞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는 바로크 연주 관행을 성악곡에 접목한 최초의 앙상블 중 하나다. 이번 내한공연에서 들려줄 ‘바흐 b단조 미사’는 바흐 생애 후기에 작곡된 걸작이다. 웅장한 푸가, 섬세한 솔로, 극적인 합창이 어우러진 종교 음악의 진수로 꼽힌다. 이번에 소프라노 마리 루이제 베르네부르크와 카운터테너 알렉스 포터 등이 함께한다.
카운터테너는 훈련을 통해 남성 최고 음역인 테너를 넘어 여성 음역(알토)에 해당하는 소리를 내는 남성 성악가다. 한국 대표 카운터테너 이동규가 9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정규 음반 2집 ‘바로크로그’ 발매를 기념하는 동명 리사이틀을 연다. 오랫동안 국제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해온 이동규는 바로크 기타리스트 브루노 헬스트로퍼, 피아니스트 조윤성,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와 함께 바로크 음악의 본질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조명할 예정이다.
‘옛 음악 새 연주’의 저자인 이준형 음악평론가는 시대 연주 열풍에 대해 “19세기 이후 클래식 음악은 악기의 표준화, 작곡과 연주자의 분리, 세세한 악보 지시 등으로 그 이전의 자유로움을 다소 잃은 느낌이 있다. 이에 비해 시대 연주는 고음악의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측면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면서 “고음악에 관한 관심과 탐구는 이제 사라진 시대를 향한 회고적 재현이나 복원이 아니라 지극히 현대적이고 창조적인 행위”라고 평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