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에 종영한 KBS ‘다큐멘터리 3일’은 72시간 동안 뭔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프로그램이다. 2015년 8월 15일에 기차 여행을 하는 청춘을 촬영했다. 당시 PD는 옛 안동역 앞에서 촬영을 마친 뒤 여대생 2명에게 말했다. “10년 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
10년이 지났다. 제작진은 그날 그곳에 가기로 했다. 프로그램도 폐지된 마당에 스치듯 내뱉은 말을 10년이 지나 지키기로 한 거다. 낭만이다. 난 그들이 재회하길 바랐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재회 여부를 특별편으로 제작한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확산했고, 그날 그 장소엔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렸다. 유튜브 라이브 채팅창에 ‘현장에 폭발물을 터뜨리겠다’는 글이 올라와 촬영을 중단하는 바람에 만남이 성사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재회 여부는 이 칼럼이 게재되는 날(22일) 밤 10시에 알 수 있다. 촬영이 끝난 뒤 PD는 SNS에 ‘72시간은 여전히 낭만이었다’고 적었다.
순간 내뱉은 약속을 세월이 지나도 지키려는 마음은 낭만이 됐다. 문득 궁금해졌다. 10년 전 나는 어떤 기사를 내뱉었던가. 2015년 8월 15일자 신문을 폈다. 내 바이라인(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이 적힌 줄)은 없었지만 국민일보 1면 제목에 눈길이 갔다. ‘아베, 마음 없는 과거형 사죄… 恨, 그대로’.
그날은 광복 70주년이었다. 일본 총리는 1995년부터 10년마다 종전일 무렵 각의에서 담화를 의결해 발표했다.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을 토대로 앞으로 이러이러한 마음을 품겠다는 일종의 약속이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전범국이라는 사실 앞에서 만큼은 낮은 자세를 보였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각각 전후 50년(1995년), 60년(2005년)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얘기했다.
그러나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는 전후 70년 담화에서 직접 사과하지 않았다. 과거 정권의 언급을 인용한 게 전부다. 그러면서 “자손에게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남겨줘선 안 된다”고 했다. 더는 사죄하지 않겠다는 얘기였고, 긴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됐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일국의 총리가 내놓은 언어치고 아베의 말은 한없이 가벼웠다. 기존 일본 정부의 담화를 뒤집는 말이기도 했다. 정치적 계산에 따라 약속을 저버리는 일은 정치판에 허다한 일이라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말한다. “한번 내뱉은 약속의 값어치는 100금 이상 값어치가 있어야 한다(일낙백금)”고.
또 다시 10년이 지났다. 아베의 선언대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전후 80년 담화를 내놓지 않았다. 과거사 사죄를 반대하는 자민당 내 보수파 의원의 반발을 의식해서다. 그러나 이시바는 세월이 지나도 응당 지켜야 하는 마음에 대해 알고는 있는 것 같다. 그는 도쿄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말했다. “전쟁 후 80년이 지났고 지금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다수가 됐습니다. 전쟁의 반성과 교훈을 지금 다시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비통한 전쟁의 기억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서약을 세대를 넘어 계승하고 평화를 위한 행동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내일(23일)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가 만난다. 두 정상은 양국의 관계 발전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할 것 없이 자국 중심주의가 판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진짜 필요한 건 역설적으로 ‘낭만 외교’일지 모르겠다. 낭만은 정치적 계산을 떠나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지킬 건 지키려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이시바가 사죄와 반성의 메시지를 내놓길 바란다.
이용상 산업2부 차장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