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체면과 지성, 이제 AI에게 배워야 할 때

입력 2025-08-23 00:05
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게티이미지뱅크

새의 행동을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동물학 박사과정에 있던 그는 나와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전공을 그렇게 소개했다. 딴에는 사회과학자로서 자부심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던 때라 동물을 연구하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너무 명료한 그의 대답이 순간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는 비교가 필요하다. 알고자 하는 대상만 봐선 그것의 의미나 실질적 기능을 파악하기 어렵다. 주위의 다른 생명체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인간과 비교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실체적 이해를 넓혀간다. 여러 생물유전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오랑우탄이나 침팬지 같은 유인원은 물론 개미나 벌의 행태를 연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들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그 둘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방식으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요소와 조건을 찾아 나간다.

인공지능. 이제 더 강력한 비교군이 나타났다. 매일 폭우처럼 쏟아지는 AI 관련 뉴스와 영상 콘텐츠에 이제는 질식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단연 인공지능에 의해 가장 빨리 대체될 직업이다. 가장 먼저 지목되는 건 화이트칼라다. 기존 판례를 수집해 정리하는 수습 변호사, 환자의 fMRI 이미지를 판독해 진단을 내리는 전문의, 과거 유사 연구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연구논문을 작성하는 교수, 인터뷰나 취재 자료를 대중의 말로 옮기는 기자. 인공지능에 의해 가장 먼저 밥그릇을 잃게 될 직업군으로 꼽힌다.

당황스러운 동시에 두렵지만,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실존 자료만 충실히 따르도록 학습시켜 두면, 자료 요약과 재구성은 생성형 AI가 웬만한 신임 변호사나 박사 학생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수행한다. 의료 이미지 판독도 의사보다 인공지능의 진단이 더 정확하다고 여러 차례 실험에서 밝혀진 바 있다. 기자들도 AI가 득세하는 현실에 한숨을 내쉰다. 시중의 생성형 AI 플랫폼에서 원하는 방향이나 톤을 알려주면 완벽하진 않아도 꽤 그럴싸한 기사가 완성된다. 언론인 개인의 역량이 여실히 드러나는 취재나 인터뷰 영역도 안심하기 어렵다.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질문, 과연 대기자만 할 수 있을까.

전공 특성상 통계와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필자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몇 해 전만 해도 수업 전반부 코딩 강의 중 1/3의 수강생이, 이어지는 통계 강의에서 1/3의 학생이 탈락했다. 작년부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코딩은 물론 데이터 분석과 차트 작성까지 생성형 AI가 알아서 해준다. 일명 ‘문과라 죄송’한 학생들이 데이터 사이언스의 영역으로 약진할 대전환기이기도 하지만 교과과정의 절반 이상을 인공지능에 내줘야 하는 필자는, 교수로서의 정체성에 스스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연구 보조로 함께하는 학부생들을 보면 무력감이 이어진다. 데이터 분석 지식이나 코딩 능력이 없어도 생성형 AI를 활용하면 프로 수준의 데이터 분석과 논문 쓰기가 가능하다. 어떤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할지 아이디어만 있으면 이를 실행하는 것은 더는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새로운 지식 생산과 논문 출판이 본업인 학자에게 AI의 등장은 기회이자 동시에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다. 생산성의 폭발로 양질의 논문을 더 쓸 수 있지만,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과연 학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화이트칼라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즘 어딜 가나 AI 이야기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슈다. 새로 출시된 AI 플랫폼의 성능이 어떤지, AI 시대에 살아남는 데 필요한 능력은 무엇인지, AI가 특이점에 도달했을 때 세상은 어떻게 바뀌는지, 오가는 말속에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AI는 어디까지 진화할까’ ‘AI가 대체할 수 있는 한계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으로 귀결되는, 바로 인류와 인공지능 사이의 경계선(boundary condition). 즉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대한 가장 원초적 호기심으로의 회귀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의 비교를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해왔다. 그러나 그 간극은 여전히 멀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를 한 차원 더 높이려면 인간과 가장 닮았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객체와의 비교가 필요한데, 이제 AI가 그 역할을 맡게 됐다. AI의 등장은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위협이기도 하지만, 인간다움에 대한 고찰과 이해를 격상시킬 기회임도 분명하다. 이를 통해 인간의 자기 이해는 분명 더 진화한다.

인공지능 기반 머신러닝과 사회심리를 강의하는 필자는 의도치 않게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때가 있다. 인공지능은 최초 설계 때부터 인간의 뇌, 특히 신경세포의 행동을 모방하도록 만들어졌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이 일정 한계(역치)를 초과하면 뉴런이 폭발하고 이것이 서로 연결된 다른 뉴런의 연쇄 활성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지각과 인식이 이뤄진다. 유사한 자극에 반복 노출되면서 뉴런의 폭발 시퀀스와 말초적 반응에 일정한 패턴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학습의 기본 단위가 된다. 학습이 반복되면서 세계를 읽고 이해하는 틀, 프레임(frame)이 생겨난다.

명칭만 다를 뿐 인공지능도 인간이 뇌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적절한 가중치와 활성 함수(인간의 뉴런)를 활용해 모델을 만들고, 입력 데이터에 따라 일정한 출력값을 산출한다. 초기 모델은 무작위로 시작해 오답을 내지만 반복 학습을 거치며 주어진 입력값으로부터 원하는 아웃풋을 산출하도록 조금씩 모델을 수정한다. 그 횟수가 만 번, 십만 번으로 늘면서 점점 정교해지고 실측치에 가까운 예측치를 제시한다. 특히 입력값으로 들어오는 데이터의 크기가 커질수록 모델은 한층 더 정교해진다. 기존의 것과 양상이 다른 데이터를 흡수해 모델을 꾸준히 수정하기 때문이다.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의 크기와 학습량에서 우리는 결코 기계를 능가할 수 없다. 수백만 번의 모의 대국을 경험한 알파고에 한 번의 패배를 안겨준 이세돌 9단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애석하게도 이와 유사한 광경에 놀랄 일은 앞으로 점차 사라질 것이다. 데이터의 크기와 컴퓨터의 처리 속도는 더 크고 빨라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리 눈에 덜 뜨이는 차이점은 모델의 수정 가능성. 인공지능은 새로운 데이터가 들어올 때마다 자신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모델을 조금씩 수정해 나간다. 이는 학습이 계속됨을 뜻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속성을 인공지능이 가진 유연함과 겸손함, 혹은 지성(intelligence)이라 말하고 싶다. 직간접 경험을 통해 얻는 정보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이나 이론을 바꿀 수 있는 태도를 지성이라 정의한다면 특히 그렇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이 영역에서도 우리는 인공지능에 뒤지고 있는 형국이다. 자신의 이론이나 가설, 즉 프레임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를 팩트로 인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프레임과 일치하는 팩트만을 가치 있는 정보로 인정하거나 불일치하는 팩트를 거짓으로 치부하며 무시하기 시작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학습을 통한 지적성장이 서서히 멈춰가고 있다.

프레임과의 일치 여부에 따라 정보의 취사를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다. 그에 반해 데이터에 따라 꾸준히 모델을 수정하는 것이 인공지능의 업(業). 지구상에서 둘 중 누가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행동은 우리를 인지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세계관을 부정하는 정보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특히 그 세계관에 과몰입해 있거나 그것을 누군가와 공공연히 나눴을 때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일관성이 떨어지는 얕은 지식의 소유자로 낙인찍히느니 나를 공격하는 정보나 정보원을 공격하는 편이 낫다.

반면 인공지능엔 체면이란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몰염치란 뜻이 아니라 그저 현실에 대한 이해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물론 인간의 삶에 있어 어느 편이 더 나은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과의 비교에서 왠지 벌써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듯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하다.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