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차별의 냄새

입력 2025-08-22 00:32

우리 속 이방인 찾아내 집단 혐오까지 불러…
접촉 늘리고 함께 하는 시간 많아야 한다

지난 6월 뉴욕타임스는 21세기 최고 영화 100선에 봉준호의 ‘기생충’를 1위로 발표하며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파괴에 던지는 맹렬한 일갈”이라는 사유를 밝혔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은 21세기 세계의 도시들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삶의 격차를 신자유주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평가받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두 주거지를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대비하여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가 사라질 미래 어느 시점의 관객들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시각적 미장센 때문은 아니다. 주거 환경이나 옷차림, 자동차나 휴대전화, 도시 풍경 같은 시각 배경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좁혀지거나 격차와 상관없이 모두 ‘올드’하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그 모든 시각적 미장센을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가상적 감각에 불과한 ‘냄새’ 위에 쌓았다.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가난한 자들에게서 나는 냄새의 종류는 다를 수 있지만 가난하지 않은 자들이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가장 강력한 감각이 ‘냄새’라는 점을 놀랍도록 간파한 것이다.

냄새는 나와 다른 낯선 배경의 타인을 인지하게 한다. 그래서 냄새 혐오를 연구하는 이들은 부족사회였던 과거 인류에 냄새가 위험 인자를 구별하여 ‘오염’을 미리 방지하고 집단의 안전을 지키게 했던 중요한 감각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나 취약자를 집단의 다수로부터 분리해 차별하게 하는 사회문화적 풍토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하고 재생산하게 만드는 집단의 편향된 혐오 감각이 돼 왔음도 비판한다.

지난해 여름 이주 배경의 아동들과 함께한 캠프에서 11세밖에 되지 않은 한 소녀의 몸에서 났던 냄새를 나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몸에서 나던 냄새를 처음 맡았던 내 육체의 즉각적 반응과 사고의 흐름을 기억하고 있다.

분명히 나는 이주 배경의 아동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캠프에 온 아이 모두를 따뜻하게 환영했다. 그러나 ‘한민족’이라는 인종·문화적인 판타지와 ‘중산층’이라는 계급적 삶의 지반 위에 형성된 내 육체의 감각이 나의 ‘도덕적 선의지’와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마치 내 의지의 연약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냄새를 맡은 내 육체는 아주 찰나지만 콧구멍 안쪽을 경직시키며 숨을 멈추고 아이에 향한 내 환영의 걸림돌을 순간적으로 만들어냈다.

더 놀라운 것은 냄새가 차별의 방식임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 의식에서 동시에 변명거리를 찾아냈다는 점이다. 냄새를 거부하는 내 육체의 감각을 문제 삼기도 전에 내 의식은 그 아이가 한국 사회에서 당하게 될 차별을 걱정하며 마치 문제는 내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전부 넘겨져 있는 것처럼 머릿속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냄새가 차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차별의 사회적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적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 구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고, 차별의 제도와 법을 바꾸는 데에 목소리를 함께 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의지와 합리적 사고, 정치적 협력은 수십 수백 년 대대손손 쌓아온 육체의 감각 앞에 무기력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태국 영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수백만 달러를 버는 법’은 유산을 노리고 암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는 손자의 발칙한 분투기를 그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냉담하기만 한 할머니에게 지칠 즈음, 할아버지를 잘 돌봐 유산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촌이 질문을 한다. “너, 할머니에게서 아직 냄새가 나?” 냄새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함께 보낸 시간의 총량임을 짚어낸 것이다. 그러니 이제 위선을 따지며 자책하기보다 대면과 접촉의 시간을 늘리도록 해보자. 그것이야말로 모든 도덕적·정치적 행위들보다 앞서서 차별의 냄새에 저항하는 기초적인 방법이다.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