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돈 베이커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학을 가르치며 ‘한국인의 영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한국 종교의 대표적 특징을 공동체주의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의 영성은 단순히 개인이 신을 향해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연대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죄와 악 역시 단순히 신과의 관계 왜곡이 아니라 공동체를 깨뜨리는 구조적 악으로 이해됐습니다. 그러나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와 정보화를 거치며 이러한 전통이 약화된 것은 아닌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일랜드에서 유학하던 시절 우연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더 나은 삶의 지수’에서 ‘공동체 지수’라는 항목을 봤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비율을 측정한 것인데 아일랜드가 1위, 한국이 꼴찌였습니다. 아일랜드에서는 아이들과 횡단보도 앞에 서면 차들이 정지선보다 멀리 떨어진 곳부터 멈췄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생명 존중이었습니다. 귀국 후 한국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오히려 경적을 울리며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의 공동체성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제물 문제가 아니라 인격과 태도의 문제였습니다. 가인은 질투 끝에 아벨을 죽였지만 사실은 자신을 해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은 대립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통해 온전해지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흙으로 빚어진 외형’, 아벨은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를 뜻합니다. 육체와 호흡이 함께해야 온전한 인간이 되듯, 가인과 아벨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은 ‘흙’, 하와는 ‘생명’입니다. 흙만 있으면 죽은 존재이고 생명만 있으면 허상입니다. 두 존재가 만나야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따라서 성경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어떤 학자는 이를 “이웃을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가 곧 네 몸이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합니다. 이웃을 미워하거나 해치는 것은 곧 자기 파괴 행위입니다.
성경은 한 개인의 죄가 공동체 전체를 흔드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고통받았고 다윗의 죄로 나라 전체가 징벌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 전체를 구원했습니다. 한 개인과 공동체는 분리될 수 없는 운명공동체라는 ‘집단적 인격’ 개념이 성경에 깔려 있습니다.
유럽 체류할 당시 가장 인상 깊었던 곳 중 하나는 독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였습니다. 수백만 유대인과 수많은 약자들이 희생된 그 자리, 유대인의 회당 정면에는 히브리어로 성경 말씀이 한 구절 새겨져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게 하소서.”(시 9:20, 새번역) 우리가 하나님 없이, 이웃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는 공동체성이 무너지고 서로를 가인과 아벨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함께 있어야 온전한 인간입니다. 이웃은 나를 온전하게 만드는 나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뜻 안에서 서로를 품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임영섭 경동교회 목사
◇경동교회는 1945년 설립된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에큐메니컬 교회로 민주화와 정의·평화·생명을 위해 헌신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