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작가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한 인물을 다룬다. 알렉산더 마스터스는 이런 통념을 뒤집는 전기 작가다. 첫 작품 ‘스튜어트:거꾸로 가는 인생’(2005)은 노숙인 쉼터에서 활동하다 만난 스튜어트 쇼티라는 노숙인의 인생을 역순으로 담았다. 같은 이름의 TV 드라마로도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두 번째 전기는 마스터스가 사는 건물의 집주인이자 괴짜 천재 수학자 사이먼 필립스 노턴을 주제로 한 ‘우리 집 지하실의 천재’(2011)였다. 일반적이지 않은 인물에 관심을 두는 저자의 손에 어느 이름 없는 인물이 쓴 148권의 일기장이 들어간 것은 우연이었겠지만 그것을 전기로 만들어낸 것은 필연이었다.
‘폐기된 인생’은 2001년 영국 케임브리지 어느 공사 현장의 쓰레기 컨테이너에서 발견된 일기장에서 시작한다. 50년에 걸쳐 1만5000페이지, 500만 단어로 쓰인 누군가의 인생은 작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추적 과정에서 밝혀지지만 148권의 일기는 전체 일기의 8분의 1에 불과하고, 실제 일기의 정확한 총 권수는 1000권, 4000만 단어에 가깝다.
처음엔 일기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일기에는 이름이 무엇이고 집이 어디인지 하는 당연한 신상을 적지 않는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그저 살아있는 ‘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일기장을 잊었다. 그러던 2011년 새로 이사한 집에서 일기장이 담긴 박스를 창고에 옮기면서 쏟아져 나온 일기장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피로 얼룩진’ 일기장이었다. ‘나’는 “그때 끔찍하게도 내 몸에서 왈칵 피가 뿜어나왔고 집 안팎을 뛰어다니며 필사적으로 니지를 불렀다” “그토록 많이 그토록 갑작스레 흘린 건 난생처음이었다”고 적었다. 처음엔 칼부림인 줄 알았지만 일기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니지’는 엄마였고, ‘나’는 첫 월경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여자임이 밝혀진다. 마스터스는 흥분했다. 다시 일기를 들여다보고 싶어 안달했다. 그것은 ‘에로티시즘’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여자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적 없는 남자가 있을까.”
마스터스는 이제 일기에 빠져든다. 마스터스는 “전기를 쓰는 사람조차 그 대상이 누군지 모르는” 익명의 일기 작가의 전기를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저자에게 익명은 중요했다. 그는 “그것은 누구의 일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나’에게 이름을 붙이기만 해도 일기를 흥미롭게 만들던 필수적인 부분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필수적인 부분은 바로 “고요한 보편성이라는 감각”이다.
5년간 일기를 읽어나갔다. 물론 준비작업이 필요했다. 일기를 모두 복사했고, 형광펜으로 신체적 묘사는 파란색, 전기적 사실은 오렌지색, 이름은 핑크색, 이런 식으로 정보를 분류했다. 어느 정도 일기 주인에 대한 얼개가 그려졌다. ‘나’는 “셰익스피어 권위자이자 작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10대 때 이미 최소 세 편의 소설을 썼다. 온종일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그림이 반 고흐에 필적한다고 확신했고, 피아노도 괜찮게 쳤다. 예술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사랑했고 그 자신도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며 “내 인생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일기의 주인공이 익명으로 남아 있기를 소망했지만 호기심을 못 이기고 추적해 나가면서 ‘곤란한’ 정보들이 튀어나왔다. 마스터스는 “파헤쳤다간 일을 죄다 그르치겠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6개월간 기간제 사서로 일했다는 케임브리지 공공도서관과 그녀가 다녔던 퍼스 여학교를 찾아 자료를 수소문했다. 필적 감정을 의뢰하기도 하고 사립 탐정도 찾아갔다. 저자는 사립 탐정을 만난 이유에 대해 “일기 주인을 찾으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방식으로 피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익명의 주인공은 서서히 정체를 드러냈다. 자매가 셋이었다는 가계도가 얼추 그려졌고, ‘1939년 5월 22일’이라는 생일도 찾아냈다. 마침내 ‘로라’라는 이름마저 알게 됐다. 로라는 살아 있었고, 집 주소까지 특정됐다. 첫 만남이 찾아왔다. 사적인 일기로 전기를 쓴다는 것은 일기 주인이 반대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라는 상관없다고 했다. 148권의 일기가 사라진 것도 몰랐다. 그는 지금도 계속 일기를 쓰고 있었다. 하루에 한 시간 반씩, 한 권을 다 채우면 바로 다음 권으로 넘어간다. 지나간 일기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만을 위해 “펜이 종이에 닿는 느낌이 좋아서” 쓰고 있다. 일기 속 로라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직접 대면한 로라는 매일 세 종류의 신문을 받아보며 읽고 쓰면서 하루를 보내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책 출간을 앞두고 저자는 로라에게 원고를 보여줬다. 로라가 미쳤다는 의심을 시작으로 부끄러울 수 있는 짝사랑과 예술가로서 실패한 경험들이 줄줄이 드러났다. 이 모두에 대해 로라는 “굉장히 근사하다”고 말했다. 저자는 “역사상 가장 다작한 일기 작가” 로라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일상적이면서도 기이한, 무기력하면서도 긴장된 인생의 소리 죽인 격렬함이었다.”
⊙ 세·줄·평 ★ ★ ★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듯하다
·번역이 이물감 없이 매끄럽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