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용 목사의 스티그마] 평범함이 한국교회를 구원한다

입력 2025-08-21 00:30

‘장자(莊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목수가 좋은 목재를 구하려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어느 마을 사당 옆에 서 있는 떡갈나무를 보게 됐다. 어느 나무보다 아름다웠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의 나무였다. 그러나 목수는 그 나무를 보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쳤다. 그의 제자가 목수에게 물었다. “오랫동안 이만 한 나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왜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그냥 지나쳐 가십니까.”

목수는 대답했다. “저 나무는 쓸모가 없다. 그것으로 만든 배는 가라앉을 것이고, 관은 금방 썩을 것이며, 그 나무로 제작된 모든 도구는 쪼개질 것이다. 쓸모없는 나무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무는 오래 살 수 있었다.”

대답을 들은 제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꿈속에서 그 아름답고 웅장했던 떡갈나무가 말을 걸었다. “과일나무는 열매가 익자마자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는다. 튼튼한 나무는 금방 잘려나간다. 그런 나무들은 쓸모 있으므로 자연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나는 오랫동안 쓸모없어지려고 노력했다. 별 볼 일 없는 나무처럼 있으니 사람들은 손도 대지 않았다.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이렇게 크게 자라서 이곳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한국교회는 큰 나무와 같은 어른을 찾기 어렵다. 천주교나 불교 지도자들이 별세하면 언론과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추모하려고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세상은 교계의 어른과 같은 지도자가 세상을 떠나도 관심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너무도 쓸모 있는 삶을 이 땅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는 나중 된 자(쓸모없는 자)가 먼저 된 자(쓰임받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고 부자와 같은 특별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저 하늘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을 세상도 아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 출판계에서는 아무리 스타 목사를 띄워서 책을 팔아 보려고 해도 예전의 마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과거 수천명씩 모이는 집회와 행사는 이제는 절반은커녕 3분의 1도 참여하지 않아 존폐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목회자들은 그런 곳에서 얼굴과 이름을 내려고 한다. 참된 성목이 되기 전, 쓸모 있는 척하는 나무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치유의 특별함으로 목회를 하려던 목회자는 수많은 성도에게 상처만 주고 있고 돌봄이라는 주제로 목회의 빛을 내려는 교계 지도자들은 정작 자기 교회 성도들은 돌보지 않은 채 외부 행사만 돌보고 다니는 모습이 한국교회 현실이다. 민중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외치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민중이라는 금송아지 우상을 앞에 두고 자기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신학교와 교회에 밥그릇 하나를 더 차지하려 하고 있다. 자기 교회 성도들을 물량화해서 대형교회, 부자교회, 잘나가는 교회, 유명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한국교회는 특별하다 못해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교회가 되어 더 이상 진짜 천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성도들은 말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교회, 그런 목사님을 보고 싶다.” 배고플 때 찾아가면 열매를 내어 주고, 목재가 필요할 때 자기 몸통을 내어 주며, 지치고 힘들 때는 넓게 자란 가지와 잎들로 그늘이 되어주고, 그루터기에 앉을 자리를 내어 주는 교회. 언제 어디에서든 만나 작은 일상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너무도 평범해서 같이 있어도 함께 있는 줄 모르는 그런 목회자.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게 될 때 사울은 자기의 갑옷과 칼을 주려고 했다.(삼상 17:38) 그러나 다윗은 전쟁에 꼭 필요한 칼과 창, 갑옷을 버리고 돌과 물매를 택했다.(삼상 17:40) 교회를 찾는, 아니 아직까지도 교회에 소망을 두고 남아있는 대다수의 성도는 교회와 목사에게 사울의 갑옷과 칼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목자가 가진 물맷돌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특별하지 않지만 각자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이 구원을 이룰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이제 교회도 목사도 좀 덜 나서고 좀 덜 특별했으면 좋겠다.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만져줄 수 있도록 말이다.

김주용 연동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