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듣기’의 힘

입력 2025-08-20 00:35

“학교를 계속 다닐지, 휴학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공부하기 싫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학생 A씨는 이렇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대부분 왜 학교를 휴학하려고 하는지, 왜 공부가 싫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등에 대한 질문을 해서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 좋은 상담이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전공하는 ‘인간중심상담’ 이론에서는 다르게 접근한다. 인간중심상담자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존재가 드러나도록 귀 기울인다. 그는 내담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마음과 고민, 말하지 못한 불안과 상처까지 함께 듣고자 노력한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동시에 미래를 염려하고 있음을 함께 듣는다.

이러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것은 상담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과정이다. 말하기와 듣기는 모두 의사소통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다르다. 말하기는 자신의 내면을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고, 듣기는 상대편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돕는 행위다. 그래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충고하고, 방법을 알려주거나 지시하는 일, 즉 말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말하는 사람이 자부심과 편안함을 느낀다.

상담에서 잘 듣는다는 것은 내담자의 존재 가치가 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돕는 과정을 의미한다. 상대편이 포장하고 싶고, 가리고 싶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심리적 세계를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듣는 일은 어렵다. 이는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위로하는 수준이 아니라, 상대가 어떤 조건에서도 존중받는 존재임을 느끼도록 돕는 깊은 행위다. 내가 존중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존중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들음을 통해서 존중을 전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상담자가 그의 이야기를 그렇게 들었을 때, A씨는 상담자를 믿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적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죄책감, 부담감, 열등감 등을 솔직히 이야기하며 감정을 밖으로 배출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A에게는 치료적 경험이다. 처음에는 과거 상처, 고통, 지금의 무너진 자아상을 이야기하며 위로와 위안의 경험을 한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다.

진정한 치유적 변화는 그 후에 나타난다. 상담의 핵심은 내담자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감당하고 무엇을 피하는지, 그런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고백하는 순간, 내담자는 내적 자기를 드러내고 만난다. 바로 그 경험이 치유와 성장의 힘이 된다. 그는 마침내 자기답게 세상을 만나고 문제를 해결한다. A씨는 “저는 늘 누군가 제 문제에 관해 결정해주기를 기다렸어요. 스스로 결정하면 실수를 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실수하더라도 제가 결정해 보고 싶어요”라고 고백했다. 점차 내적 자기를 마주하고 받아들였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스스로 깨달았다. 이제 그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게 됐다. 누군가 대신 결정해주기를 바라던 사람으로부터 미흡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동안 싫어하고 멀리하고 숨겨뒀던 자기를 만나 진정한 자기의 삶을 되찾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상담에서 듣기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문제보다 더 큰 존재로 내담자가 성장하도록 돕는 깊은 인간적 행위다. 듣는다는 것은 상담과 치유의 핵심이자 인간 존중의 출발점이다. 모든 대인관계 불협화음, 조직 내 갈등, 사회적 통합의 실패는 결국 상대편 이야기를 듣지 않아 생긴다. 상대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관계를 살리고 우리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근본적 힘이다.

차명호 평택대 상담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