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씨를 다듬는 외할머니의 작은 등에서 전쟁의 상흔을 안고도 자식 다섯을 키워낸 강인한 여인의 삶을 봤다. 또 언젠가는 멀찍이 앞서 걷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에서 삶의 무게를 나누며 한평생 지켜온 사랑을 봤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리는 친구의 등에서는 홀로 감당해야 할 외로움과 현실에 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봤다. 어떤 이야기나 감정은 얼굴보다 등에서 먼저 전해진다는 걸 점점 더 자주 느낀다.
얼굴은 말을 건넨다. 눈빛으로 감정을 전하고, 표정으로 마음을 드러내며, 목소리로 힘을 싣는다. 하지만 등은 침묵한다. 아무 말 없이 많은 것을 보여준다. 나이테처럼 겹겹이 포개진 사연들, 버거웠던 삶의 무게, 기쁨으로 충만했던 시절, 공든 탑처럼 쌓아 올린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마워’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직접 전하기보다 가만히 다가가 등을 감싸 안고 싶어진다. 등을 바라본다는 건 그 사람의 삶과 내면의 풍경을 헤아리는 일이 아닐까. 그렇기에 누구에게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마음이 일렁였던 경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어떤 등이 있는 게 아닐는지.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는 아내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표정이나 몸짓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등 너머로 흐르는 감정이 보는 이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은은하고도 강렬한 이 감정을 그림 속에 영원히 봉인하고 싶었는지도.
그간 너무 많은 시간을 정면에 쏟으며 지냈던 건 아닌지 잠자코 생각해 본다. 화려한 영상과 자극적인 소리, 빠르게 오가는 말에 홀려 소중한 사람의 등을 무심히 지나친 순간이 못내 아쉽다. 삶은 등에도 깃든다. 고단한 하루를 견뎌낸 어깨,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에, 놓쳐버린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말이 없어 더 진실하고, 소리 없이 더 뭉클한 이야기가 그들 등에 있으니.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