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던 그날 밤, 평소 교류하던 일본 기자들의 전화가 연이어 걸려왔다. 모두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재명정부의 대일 정책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들의 목소리에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섰다. 당대표 시절 이 대통령의 강경 발언들이 여전히 일본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섣부른 낙관보다는 솔직한 우려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문재인정부는 약속을 뒤엎은 정권으로 기억된다. 2015년 위안부합의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선언됐지만 정권교체 후 문재인 대통령은 재검토 의사를 밝혔다. 비록 일본에 합의 파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함으로써 합의를 뒤집었다는 인상을 남겼다. 그 결과 명분도 실리도 챙기지 못한 채 양국 신뢰만 크게 손상됐다. 이 대통령 역시 야당 대표 시절 윤석열정부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방안에 대해 “삼전도 굴욕에 버금가는 치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일본 측에서는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러나 취임 첫날 이 대통령의 메시지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 관계에는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며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천명했고, 전임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에 대해서도 “큰 틀에서는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는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국가 신뢰를 우선한다는 분명한 선언이었다. 더구나 일부 지지층의 반발을 감수하고 내놓은 메시지였기에 외교적 진정성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후 행보도 일관됐다. 취임 닷새 만에 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통화를 했다. 중국보다 일본을 먼저 선택하자 일본 외교가에서는 “진보 정권임에도 일본을 우선했다”는 놀라움과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이어 6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당시 열린 첫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관계’를 거듭 강조했고, 셔틀외교 재개에도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이 품어 왔던 의구심도 상당히 해소됐다.
이제 며칠 후면 도쿄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는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청사진이 교차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불과 며칠 전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 참배로 긴장이 다시 고조된 상황에서 과거사 갈등을 어떻게 지혜롭게 관리하느냐가 회담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동시에 이번 회담은 이재명정부 실용외교의 첫 시험 무대이기도 하다. 과거 정권들이 정치적 셈법에 매몰돼 외교 신뢰를 훼손했던 것과 달리 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정책 일관성과 국익 중심 원칙을 줄곧 강조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외교 현장에서도 관철될지는 미지수다. 이번 회담에서 한국 외교가 진정한 성숙함을 보여주고, 신뢰와 책임 위에서 미래의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이창민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