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혼인빙자간음죄 폐지, 2015년 간통죄 폐지,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된다. 대한민국 헌법 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생활, 사적인 일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국가의 간섭이나 침해를 배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가는 교제 관계를 사적 영역으로 규정하며 개입을 최소화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경찰이 취할 수 있는 보호조치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지난 10일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교제 관계를 더 이상 사적 영역으로 보지 않고 사회문제로 인식해 국가의 개입을 강화한 것이다. 경찰청이 제작·배포한 ‘교제폭력 대응 종합 매뉴얼’에 따르면 피해자 진술과 무관하게 스토킹처벌법을 적용한 보호조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교제폭력을 직접 다루는 특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역시 교제폭력 관련법은 제정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가정폭력방지법, 스토커규제법 등을 적용하고 있으며, 내각부가 지방공공단체에 배포하기 위해 제작한 ‘스토커 피해자 지원 매뉴얼’에도 교제폭력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다.
교제폭력은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특정 욕구를 기반으로 발생하며, 이러한 욕구가 해소될 때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반복성’과 ‘점진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교제폭력이 사적 문제가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단순한 언어폭력에서 시작해 협박, 신체 폭력으로 이어지고, 최악의 경우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2024년 4월 거제 교제폭력 살인 사건, 5월 강남 의대생 살인 사건 등이 보여주듯 이는 더 이상 개인적 갈등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하는 심각한 범죄로 번지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교제폭력 입건 건수는 2018년 1만203건에서 2023년 1만3939건으로 5년간 37% 증가했다. 2024년 1~4월에만 2만5967건이 신고돼 하루 평균 214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실제 구속률은 2%에도 미치지 못한다. 같은 기간 검거된 4395명 중 구속된 것은 82명(1.87%)에 불과하고, 최근 5년 평균도 2.21%에 그쳤다.
현행 형사소송법상 구속 요건인 주거 부정, 증거 인멸, 도주 우려에 교제폭력의 반복성과 위험성은 포함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협박에 못 이겨 고소를 취하하면 사건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사이 가해자의 폭력성은 더욱 강화된다. 거제 사건의 피해자는 사망하기 1년 전부터 가해자를 11번 신고했지만, 보복이 두려워 처벌불원서를 제출해 수사가 종결됐다.
이제는 교제폭력의 특성을 반영한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 첫째, 교제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필요하다. 둘째, 피해자 보호를 위한 긴급 임시조치와 접근금지명령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셋째, 교제폭력의 재범 위험성을 구속 사유로 인정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22대 국회에는 이미 교제폭력 관련 법안이 여러 건 발의돼 있다. 소병훈·정춘생·김미애 의원 등이 대표 발의한 법안은 공통적으로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해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교제폭력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
헌법은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그 자유가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행사될 때 국가가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 교제폭력은 더 이상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폭력 앞에서 국가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또 다른 생명을 잃기 전에 행동해야 할 때다.
김잔디 우석대 경찰학과 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