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산업 공동화라는 회색코뿔소

입력 2025-08-19 00:35

‘회색코뿔소’는 이름 그대로 회색의 코뿔소인데,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자칫 다가와서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고 누구나 예상한다. 이러한 점에 착안해 미국의 경제학자 미셸 워커는 2013년 예견된 위기라는 개념으로 회색코뿔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지금 우리는 산업 공동화, 즉 기업이 떠나면서 산업 기반이 약화되는 회색코뿔소의 위협에 직면했다. 산업 공동화의 트리거는 미국의 관세 압박과 중국의 과잉생산 및 산업경쟁력 추월이고, 촉매는 ‘더 센 상법 개정’ ‘노조법 2·3조 개정’ 등 기업 경영에 심대한 부담을 주는 정책이다.

지난달 말 한·미 무역 협상으로 대미 관세율은 15%로 정해졌다. 경쟁국 일본과 유럽연합(EU)의 관세율도 15%지만 관세 부담 회피와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한 대미 투자 러시는 자명해보인다. 한국은 또한 3500억 달러의 대미 산업협력 투자를 집행해야 하는데 조선 1500억 달러, 반도체·원전·배터리·바이오 2000억 달러다. 국내 제조기업이 한국이 아닌 미국에 투자를 대규모로 확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중국은 대미 수출 여건 악화에 내수 침체, 공급과잉으로 주변국에 대한 저가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미 상당한 품질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우리 기업들이 대미 투자를 확대할 경우 가성비 좋은 제품들로 국내 시장을 현재보다 더욱 빠르게 잠식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국내적으로는 기업의 해외 투자를 부추기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더 센 상법과 노조법 2·3조 개정이 대표적이다. 두 법안은 이달 말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둔 상태다. 더 센 상법은 지난달 이사의 주주충실 의무, 대주주 의결권 제한 강화(3%룰)에 이어 한 달 만에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등을 추가로 도입하는 것이다. 이들 제도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대주주의 이사회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액주주가 이익을 받을 것 같지만 실상 과실의 대부분은 투기자본이 가져간다. 이들은 남의 돈을 위임받아 주식을 산 ‘수탁자 주주’이므로 단기적 재무 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사회에 진입할 경우 기업의 장기적 성장보다는 자산 매각과 무리한 주주 환원을 요구할 것이고, 종국적으로는 경영권 위협으로 보유한 지분을 고가로 회사에 떠넘긴 후 손 털고 나갈 것이다. 공격을 당한 기업은 투자자금이 소진되면서 펀더멘털이 크게 악화된다. 실제로 한경협이 2000년 이후 행동주의 공격을 받은 시총 10억 달러 이상의 미국 기업 970개를 분석했는데, 공격받은 기업은 투자와 고용이 각각 5.6%, 8.4% 감소했으며 기업가치도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노조법 2·3조 개정은 하청 노조에 대한 원청과의 교섭권 부여, 불법파업 손실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제한, 사업 재편·합병 등 경영상 사유로 인한 근로조건 변경도 합법적 쟁의행위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자동차, 철강, 건설 등 국내 산업 구조가 다단계 협력체계로 구성돼 있음을 고려할 때 법안 통과 시 쟁의행위의 빈번한 발생으로 원·하청 간 산업 생태계가 크게 훼손될 것이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주한유럽상공회의소 역시 외국인 투자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개정에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미국과 중국의 협공 속에 국내 경영 환경마저 나빠지면 산업 공동화라는 회색코뿔소가 우리를 덮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금은 모든 경제주체가 위기의식을 가지고 기업 경영 환경 개선과 국내 투자 확대를 위해 매진할 때다. 버스 떠난 후에 손 흔들어봐야 떠난 기업 붙잡을 수 없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