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 or 보기] ‘골프 선구자’ 연덕춘은 재평가돼야 한다

입력 2025-08-16 00:22

36년간의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두 분이 있다.

첫 번째 인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이다. 두 번째는 1941년 일본오픈 골프선수권대회(이하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한국 1호 프로골퍼 연덕춘(사진)이다.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 2’ 올림픽 신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환희로 가득했어야 했을 그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손기정이 아닌 일본식 ‘손기테’,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손기정, 남승룡(베를린 올림픽 3위)을 보며 세 번 울었다. 조선 사람이면서도 조선인 행세를 못해 가슴에 붙인 일장기를 컴컴한 방안에서 신문을 통해 보면서 가슴 아파 울었다”고 했다.

2002년 11월 타계한 손기정은 체육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체육훈장 청룡장을 추서했다.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 터가 있는 서울 만리동에 넓이 2만9682㎡의 손기정체육공원이 조성됐다.

손기정만큼 국민적 관심을 끌진 못했지만 연덕춘의 일본오픈 우승 역시 엄청난 사건이었다. 한국인 최초의 일본오픈 제패이자, 골프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선수가 해외 무대에서 거둔 첫 승리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골프계는 물론 전체 스포츠계가 큰 충격에 빠졌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그래서였을까. 일본 골프사 어디에서도 ‘연덕춘’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일본식 이름 ‘노부하라 도쿠하루(延原 德春)’로 기록돼 있었고, 국적 또한 일본으로 표기됐다.

늦었지만 바로잡아야 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와 대한골프협회(KGA)는 협력해 일본골프협회(JGA)를 설득했고, 그 노력의 결과 JGA는 지난 4월 1941년 일본오픈 우승자를 한국인 연덕춘으로 수정했다. 무려 84년 만이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는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故 연덕춘, 역사와 전설을 복원하다’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 전쟁으로 유실됐다가 복원된 우승 트로피도 전달됐다. 이 트로피는 향후 독립기념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자 광복 80주년 되는 해다. 한일 양국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활발한 스포츠 교류를 이어오며 선린관계를 유지해 왔다. 많은 한국의 남녀 프로 골퍼들이 지금도 일본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연덕춘의 우승을 시작으로 골프가 양국 스포츠 교류의 물꼬를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계기로 중단된 한일 골프 대항전이 복원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4년 용평버치힐컵 한일 남자프로골프 국가대항전으로 시작된 남자 골프 한일전은 6년간 중단됐다가 2010~2012년 밀리언야드컵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됐으나 2015년부터 중단됐다.

여자골프 한일전도 1999년 첫 개최 후 2014년까지 지속됐다. 이후 4개 투어 대항전 형식으로 몇 년간 명맥을 유지하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진 상태다.

연덕춘은 생전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1968년 KPGA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초대와 2대 회장을 역임했다. 2005년 5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KPGA의 역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KPGA는 한 시즌 최저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덕춘상’을 제정해 수여하고 있다.

그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고, 후대의 칭송도 미미했지만 연덕춘이 척박한 한국 골프에 뿌린 씨앗은 그동안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다. 그가 내디딘 걸음이 오늘날 세계 골프의 주류로 우뚝 선 한국 골프의 출발점이었음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늦었지만 연덕춘의 일본오픈 우승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불꽃처럼 살다간 ‘골프 선구자’ 연덕춘의 인생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