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멤버 슈가는 고등학교 때까지 농구 선수로 활동하다 진로를 바꿔 전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는 글로벌 스타가 됐다. 이렇듯 운동 선수의 꿈을 접고 숨겨둔 끼를 살려 인생역전에 성공한 인물을 종종 보게 된다.
제주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 백유(52)도 그중 한 명이다. 그의 전 직업은 프로 골퍼였다. 1998년 6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프로 테스트에서 1위로 합격하며 당당히 프로 골퍼의 길을 걷게 됐다. 백유의 회원 번호는 00156, KLPGA 156번째 정회원이다.
그러나 두 시즌을 소화한 뒤 미련 없이 필드를 떠났다. 이후 사진, 디자인, 회화, 조형, 설치 등 다양한 예술활동을 하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프로 골퍼의 길도, 골프를 그만 두고 작가의 길로 접어 든 것도 오롯이 스스로 정한 것이기에 후회는 없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8살때 부모의 고향인 제주로 왔다. 유년 시절 장래가 촉망받는 배구 선수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골프의 매력에 빠져 골프채를 잡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혼자 집중해야 한다는 게 골프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했다. ‘슈퍼 땅콩’ 김미현(48)과 동계 훈련을 함께했다. 하지만 필드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예술적 끼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골프를 그만 두고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고 했지만 당연히 반대가 심했다. 키도 크고 운동 신경이 워낙 좋았던 만큼 부모는 백유가 운동 선수로 성공하길 바랐다. 프로가 되면 골프를 그만둬도 된다는 허락을 조건부로 받고 골프를 계속했다.
백유는 최근 만난 자리에서 “부모님이 ‘프로가 되면 설마 골프를 그만 두겠어’라고 생각하셨는지 흔쾌히 허락해주셨다”며 “운동만 했던 내가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게 부모님으로서는 미덥지 않았을 것”이라고 당시를 돌아봤다.
그는 프로로서 두 번의 시즌을 보낸 뒤 미련없이 필드를 떠났다. 사용하던 골프채를 모두 팔아 없앴다. 다시는 골프판을 뒤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였다. 그 이후 지금껏 골프채를 잡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필드를 떠난 뒤 백유는 제주에서 조용히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의 예술 활동은 오로지 독학으로 이뤄졌다. 일본에서 접한 첨단 문화와 제주도의 원초적 자연이 창작의 원천이 됐다.
그는 “일본에서 살았던 8년의 시간이 큰 영향을 미쳤다. 감수성이 가장 좋을 시기에 엑스포 등 많은 것들을 보며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며 “그에 비하면 제주도는 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디지털, 제주는 아날로그, 유년 시절에 양쪽을 경험하며 영감을 얻었다. 특히 제주도는 내게 원초적 영감을 주었다”고 했다.
물론 골프도 그의 작품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자양분이다. 골프에서 익힌 집중력과 체력이 작품 활동에 녹아들었다. 백유는 “골프는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의 준비단계 역할을 해주었다”며 “그림과 조형 작업은 정신력과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훈련된 모든 과정이 작가가 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관심을 끌었다. 제주도에서 찍은 특이한 중장비 사진을 작업실에 걸어 놓았는데 그것을 본 프랑스인 작가가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 출품을 권유한 것이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를 통해 프랑스에서 작가 백유의 첫 전시가 이뤄졌다. 이후 일본 고베·도쿄, 미국 뉴욕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개최했다.
백유의 작품 모티브는 생명, 주 소재는 피아노다. 피아노 내부 구조를 해체하고 제주 초가집 고재와 결합해 조형물, 즉 인간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그가 피아노에 매료된 이유는 피아노가 사람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백유는 “피아노 내부 모든 기능은 인간의 장기와 닮았다”며 “오스트리아 여행 중 뚜껑이 열린 피아노 연주를 보다가 마치 파편이 튀는 듯한 영감을 받았다. 귀국하자마자 중고 피아노를 구입해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피아노에 몰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제주 4·3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한라산 소주 ‘동백꽃 에디션’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가수 한영애씨의 무대 의상 콜라보에도 참여해 이효리의 레드카펫과 열린 음악회 출연 당시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백유의 작품은 장르를 불문한 종합예술이다.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다. 다름아닌 대형 조형물이다. 그는 “지금은 한계가 있지만 빌딩 앞에 우뚝 세워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대형 조형물을 머지 않은 시기에 꼭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골프웨어 콜라보 작업도 그가 꼭 해보고 싶은 영역이다. 백유는 “프로 골퍼 출신이어서 기능적, 디자인적으로 적절한 포인트를 잘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작품 패턴이 탄생한 제주에서 향후 활동도 계속 해나갈 계획이다. 백유는 “골프는 치지 않지만 가끔 제주도에서 열리는 대회에 갤러리로 보러 간다”며 “저의 미술 작품도 많이 사랑해주시고 한국 여자 골프에 대한 지지와 응원도 부탁드린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서귀포=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