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세계소리축제와 국립창극단이 공동제작한 판소리 씨어터 ‘심청’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지난 13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첫선을 보인 ‘심청’(~14일, 9월 3~6일 국립극장)은 개막 전부터 공연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창극이 전성시대로 불릴 만큼 인기를 구가하는 가운데 독일 만하임 오페라극장 상임 연출가 요나 김이 대본과 연출을 맡았기 때문이다. 요나 김은 원작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연출가의 독창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재구성하는 ‘레지테아터’ 스타일을 견지하는 만큼 어떻게 심청을 재해석할지 관심이 집중됐다.
이번 작품은 국립창극단 단원을 비롯해 무용수, 아역배우, 합창단 등 150여명이 출연하는 유례 없는 대작이다. 기존 창극에선 보기 어려운 잦은 떼창(서양음악의 합창과 달리 화음이 없음), 배우의 감정과 움직임을 실시간 포착해 스크린에 송출하는 라이브 카메라 등 보기 드문 형식을 도입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렬한 것은 효녀 심청에 담긴 유교적 가치나 동화적 판타지를 완전히 깨부수는 재해석이다. 기존 창극의 정형화된 틀을 넘어서는 무대가 ‘판소리 씨어터’로 명명한 이유를 보여준다.
서막과 2막 9장으로 구성된 작품은 초반부터 원작을 전복한다. 무대 뒤편에서 어린 소녀 60명이 소리를 지르며 무대 앞까지 뛰어왔다가 나가면서 극이 시작된다. 작품 배경도 현대로 옮겨 놓았다. TV와 냉장고 등이 현대사회의 실내를 배경으로 한다. 무엇보다 심청이 효심 때문에 남경 선인에게 자신을 파는 원작 설정과 달리 주변의 무관심과 학대 속에 어쩔 수 없이 내몰리는 상황으로 그려진다. 심봉사는 딸을 방치한 채 뺑덕어멈과의 관계에만 관심을 쏟고, 탐욕스러운 뺑덕어멈은 심청이를 장승상 댁에 노리개로 던져놓는다.
심청이 용궁에 가고 환생해서 왕비가 된다는 판타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의 판타지는 소녀의 희생에 대한 죄의식이 빚어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에 따라 심봉사가 심청을 다시 만난 뒤 눈을 뜨는 해피엔딩도 바뀌었다. 심청이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이 1막 마지막에 이어 2막 하이라이트에 다시 한번 등장하지만 2막에서 심봉사가 실제로 눈을 떠서 목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공연 내내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을 ‘눈뜬장님’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작품 곳곳에 다양한 은유와 상징이 숨겨져 있어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심청이 높은 기둥 위에 올라가고, 영상을 통해 극장 밖으로 나가는 모습은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한 수많은 심청의 희생과 생존을 상징한다. 이들의 희생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었고, 살아남은 심청들은 우리 사회가 진보하도록 만들었다. 요나 김 연출가는 “이 작품은 그동안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약자, 특히 딸들의 무덤에 바치는 진혼곡”이라면서 “수많은 심청들이 있었기 때문에 21세기에 우리가 이런 작업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관객 반응은 다소 엇갈리는 편이다. 공연이 끝난 뒤 환호와 기립박수가 이어졌지만 40여명의 관객은 공연 도중 퇴장하기도 했다. 일부 소리꾼과 전통 판소리를 선호하는 일부 관객은 레지테아터 방식의 새로운 창극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수의 창극을 무대에 올렸던 남인우 연출가는 “이번 작품은 ‘심청가’의 눈대목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원작의 이면을 드러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결말을 비롯해 작품의 해석이 무릎을 ‘탁’ 치게 했다”면서 “요나 김 연출가의 뚝심 있는 연출이 한국 창극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주=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