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93)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은 12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미국의 조선업 협력 사업인 ‘마스가(MASGA)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대통령 직속의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마스가 프로젝트는 한·미 동맹이 안보를 넘어 기술·산업 동맹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번 기회를 잘 살리면 한국 조선업은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 회장은 1960년대 불모지였던 한국 조선업의 초석을 세우고 기반을 다진 ‘조선업의 대부’다. 고등학교 3학년 6·25 전쟁 때 피난 간 부산에서 미국 군함을 보며 조선의 꿈을 키웠고 서울대 조선항공학과로 진학했다. 졸업은 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외국 조선소에 100통 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스웨덴의 대표 조선소인 코쿰스에서 월급도 주고 숙소도 주겠다는 말에 로또 맞은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 온 미친놈’ 소리 들을 만큼 죽어라 일해 영국 로이드선급협회의 검사관으로도 근무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발탁돼 K-조선의 씨앗을 뿌리고 한국이 세계 1위 조선 강국으로 성장해가는 중심에 그가 있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미 관세 협상에서 조선업 협력이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셨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당선(2024년 11월 6일)된 이튿날 윤석열 당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군함 건조, 선박 정비 분야에서 양국 협력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는 기사를 봤다. 기회가 왔구나 싶었다. 한·미 조선협력위원회를 만들어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는 스케줄이 담긴 문서를 만들어 신원식 국방부 장관에게 전달했다. 이후 윤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참고하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나중에 만났을 때 김 총리가 ‘대통령에게 전달해서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에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한·미 관계에 마스가 프로젝트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시나.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때 전세계 선박의 90%를 자국에서 만들 정도로 해양 강국이었다. 그러나 조선업 정책을 잘못 펴 지금은 유명무실해졌다. 국가 패권은 곧 해양 패권인데 미국은 한 축인 조선이 없는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조선업을 살리지 못하면 패권 경쟁에서 큰 소리 칠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고백을 건방지게 한 거다. 미 해군성 장관과 백악관 국장이 한국 조선소를 관찰하러 다니는 게 단순히 배 한 척 수리하려는 것이 아니다. 조선 관련 공급망에서 한국을 핵심 파트너로 삼겠다는 의미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중차대한 일을 개별 기업에 맡겨두면 안 된다. 정부와 기업, 연구소 등 조선 관련 모든 것을 아우르는 태스크포스(TF)가 만들어져야 하고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두고 추진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아무리 좋은 합의를 해도 세부 계획을 잘 세우지 못하면 나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처럼 말과 행동이 수시로 바뀌는 사람과는 플랜 A, B, C를 만들어놓고 대비해야 한다.”
-미국과의 조선 협력이 한국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산업에서 패권을 쥐려면 표준을 가져야 한다. 한국은 기술은 최고지만 국가 외교력이 약해 세계 조선업의 중심에 있지 못하다. 그러나 미국과 함께 그런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트럼프 대통령과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최근 딜을 했다. 미국 에너지를 인도에 공급하기로 했는데 여기에 가스운반선, 원유운반선 2500척이 필요하다. 이걸 한국에 맡기려니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인도가 무얼 하느냐, 세계에서 가장 큰 현대조선소(HD현대중공업의 울산조선소 지칭)보다 10배 큰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한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꿈 같은 조선소’를 콘셉트로 설계한다며 나한테 컨설팅해 달라는 자문이 왔다. 이게 현실화 되면 세계 조선 기술 판도가 달라질 것이다. 미국보다 더 큰 시장이 열리는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젊은 나이에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검사관이 되서 으스대고 있는데 한국에서 4·19가 나고 5·16이 터졌다. 이제 한국은 못 가겠구나 싶었는데 박정희라는 사람이 영국 대사관을 통해 편지를 보내왔다. ‘한국은 3면이 바다이니 고기를 잡든지 물건을 나르든지 해야할 것 아닌가. 한국에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몇 번 거절하다가 1961년 9월 한국에 들어왔다. 그때의 만남이 한국 조선 산업의 씨앗이 됐다고 본다.”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나.
“부산에 있는 정부 운영 조선소를 재가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가보니 간판만 조선소지, 풀밭이었다. 한국 와서 처음 한 일이 낫 들고 풀 깎은 거다. 그것이 한국 조선 산업의 현실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는 1965년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됐다. 그때부터 나는 대한민국 공인 고급 거지였다. 외국 가서 ‘돈 꿔줘요’ ‘기술 꿔줘요’ 하는 게 일이었다. 조선업이 기관차 역할을 하면 제철, 기계, 조립 등 다른 산업도 자생할 수 있다는 역발상을 했다. 그게 맞아떨어져서 1980년대 이미 세계 시장점유율 50%의 조선 국가가 됐다. 과거 박 대통령 직속으로 해사행정특별위원회가 있었고 경제수석이 위원장을, 9개 부처 장관이 위원으로 참여해 10년 걸릴 일도 속전속결로 했다. 이렇게 강력한 조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권지혜 허경구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