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베스트셀러인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쇄된 책. 영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자 2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책. 한국 근대기 첫 번역 소설…. 이쯤 되면 무슨 책인지 눈치챈 분도 꽤 될 듯한데요. ‘기독 고전 맛집’이 7번째로 소개할 이 책은 영국 작가이자 설교가 존 버니언(1628~1688)의 ‘천로역정’입니다.
천로역정은 버니언이 서문 격인 ‘이 책에 대한 변명’에 적은 대로 기독교인의 순례를 다룬 우화소설입니다. 그는 “진귀하고 유익한 걸 원하면서도 건망증이 심하다면 이 기발한 이야기를 읽어보라”며 “(이 이야기가) 당신 곁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무기력한 마음에 위안을 줄 것”임을 자신합니다.
번연이 자부한 대로 책은 영미권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18세기 영국 문학평론가인 새뮤얼 존슨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가장 교양 있는 사람이 이보다 더 찬사를 보낼만할 작품을 찾을 수 없고, 어린이도 이보다 더 재미있는 걸 찾을 수 없다는 것”이라며 극찬했습니다. 당대 유명 작품에도 여러 차례 언급됐는데요. 미국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영국 작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대표적입니다. ‘나니아 연대기’와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S 루이스도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순례자의 회귀’란 판타지 소설을 펴냈습니다.
그가 1678년 펴낸 책 1부에선 주인공인 크리스천의 순례가 등장합니다. 6년 뒤 출간된 2부에선 그의 아내와 자녀들의 여정을 다룹니다. 천로역정 이야기 특징 중 하나는 인물 이름에 그의 성정이 반영됐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천성 길에 동행한 이를 ‘신실’과 ‘소망’으로, 그를 곁길로 유혹한 인물은 ‘세속 현자’와 ‘헛자신감’로 이름 짓는 식입니다. 지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니언은 크리스천의 고향을 ‘멸망의 도시’로, 그가 순례길에 지나치는 쾌락의 도시를 ‘허영시’ 등으로 부릅니다. 물론 세속 현자의 아들로 주인공의 천성 길을 방해하는 인물 ‘예의’처럼 예외적 사례도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순례 과정서 인상 깊은 건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단호히 여정에 나선 그의 길이 탄탄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유혹과 위기를 마주하는데, 때때로 잘못된 선택을 내려 고난에 빠지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천성길 모험이 우리네 삶과 겹쳐 보이는 이유입니다. 최근 이 책을 두고 설교한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는 “천로역정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과 비슷한 데가 있다. 여정에 오른 이들이 모두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이라며 “이런 면에서 천로역정은 신앙 선조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현 기독교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천로역정 1부 마지막에서 크리스천은 소망과 함께 천성 문으로 들어섭니다. 책은 이 모든 게 자신의 꿈이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지만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만큼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인공처럼 매 순간 바른길을 택하려 노력한다면 본향, 즉 천성에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 살고자 분투하는 이에게 여전히 좋은 길잡이가 돼 줄, 현대인의 영성을 위한 고전으로 손색없는 책입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