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홉 청년 재회 약속도 아픈 역사 속 스러졌다

입력 2025-08-15 00:07
때론 일상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역사의 기록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지 4년째 되는 1941년 1월 5일 9명의 청년들이 전선으로 나가기에 앞서 경성역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들은 10년 뒤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사진에 ‘10년 후에 다시 만날 동무’라는 문구를 남겼다. 휴머니스트 제공

앳된 표정의 청년 아홉 명이 비장하게 카메라 앞에 앉았다. 사진에는 ‘10년 후에 다시 만날 동무’라는 문구와 함께 ‘1951.1.5’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이 날짜는 그들이 10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한 날짜였다. 사진 뒷면에는 9명의 이름과 실제 촬영한 날짜 ‘쇼와 16년(1941년 1월 5일)’, ‘경성역 1·2군 대합실’이라는 장소가 나온다. 1941년은 중일 전쟁이 발발한 지 4년째 되는 해로 아마 9명의 청년은 중국이나 동남아 전선으로 실려 갔을 것이다. 이들은 10년 후 다시 만났을까. 사진 뒤 ‘김국현’이라는 이름 위에는 누군가 ‘(쇼와)16년 순직’이라고 써놓았다. 입대한 그해 어딘가에서 전사한 것이다. 나머지 동기들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시대의 아픔이 서려 있는 사진이 ‘역사 컬렉터’를 자임하는 저자의 손에 들어왔다. 저자는 30여년 동안 이렇게 낡고 빛바랜 사진과 편지, 일기장, 우표와 엽서 등 작고 큰 역사를 담고 있는 ‘물건’을 모았다. 그중 110점을 고르고 골라 일제강점기에 초점을 맞추고 개항과 해방 직후를 덧붙여 한국 근현대사를 복원한다.

저자는 거시사와 미시사를 교차하며 평범한 옛사람들의 삶과 시대상을 담아냈다. 시흥보통학교(현 서울시 금천구 시흥초등학교)의 1919년 3월과 이듬해 졸업식 사진을 보면 한 해 만에 극명하게 바뀐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1919년 일장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 교사들은 모두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이듬해 사진에는 교사들의 제복과 칼이 사라지고, 일본인 교장만 양복을 입고 나머지 교사들은 한복 차림이다. 1919년 졸업 무렵은 3·1 만세운동이 조선 전역을 뜨겁게 달구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을 계기로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한다. 일제의 정책 변화는 한 초등학교의 졸업 사진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저자는 “3·1운동의 힘을 이 사진만큼 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라고 해설한다.
시흥공립보통학교의 1919년(위)과 1920년 졸업 사진이다. 일제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면서 1년 만에 제복을 입고 칼을 들고 있던 교사들의 손에서 칼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1940년 일제는 창씨개명 신청을 받는다. 말이 신청이지 강제나 다름없었다. 일부는 자결로 저항했지만 대다수는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전북 익산에서 수집한 문패는 조선인의 아픈 역사를 전해준다. 문패 앞면에는 ‘高本國吉(고본국길)’이라고 쓰여있다. 창씨 과정에서 집주인 고씨가 ‘다카모토(高本)’라는 일본 성씨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문패 뒷면에 ‘고하상(高夏相)’이라는 성명이 적혀 있다. 해방 후 기존 문패를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또 1940년 제작된 ‘조선중앙창씨명상담소’의 홍보 전단을 통해서는 일제의 정책에 작명소가 호황을 누리던 세태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밖에도 태극기가 그려진 상장과 무궁화 모양의 한반도 자수, 기미독립서 필사본, 중동학교 동맹 휴학 호소문 등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인의 저항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포착한다. 일제 강점기에 평안남도 용강경찰서에서 근무했다가 해방 이듬해 미 군정에서 다시 경찰로 복귀한 ‘이창우’라는 인물의 이력서를 통해서는 역사의 아이러니도 읽어 낸다.

저자는 서문에서 ‘제국신문’ 1899년 2월 25일자에 실린 익명의 논설 한 편을 소개한다. 꿈속에 본 대한제국의 모습을 그린 내용으로 마치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저자는 “지난 시기 한국인들은 험난한 길을 허위허위 비틀거리며 걸어왔지만 한 번도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면서 “광복 80년이 되는 해인 2025년, 새로운 출발선에 서서 우리의 미래는 다시 어떠해야 하는지 원대한 꿈을 그려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 세·줄·평★ ★ ★
·빛바랜 옛사람의 물건에는 삶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150여년의 한국근대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리한다
·술술 익히지만 천천히 음미하면 좋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