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교회는 기업화되고 기업은 교회화됐다.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라기보다 기업처럼 운영된다. 성도 수나 헌금 액수 등 지표에 집착하고 재정 상당 부분이 부동산에 집중된다. 예배는 점점 효율성과 만족을 따지는 소비 논리에 편입되고 목회자는 영적 지도자라기보다 CEO의 이미지로 인식된다. 성도는 생명을 나누는 지체가 아니라 점점 고객처럼 취급된다.
반대로 기업 문화에 종교적 언어가 도입됐다. 미션과 비전, 소명 같은 교회에서나 쓸 법한 용어를 조직 관리를 위해 차용하고 자기 계발이나 힐링 산업이 기업 안에서 소비된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예배 의식이다. 광고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구원과 초월을 약속하는 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제공한다.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는 경건과 탐욕이 뒤섞인 기괴한 혼성체로 변모했다. 교회는 세속적 욕망을 비전으로 포장하고 교회의 축복 아래 대한민국은 고삐 없는 망아지처럼 욕망을 발산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노골적인 부의 추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속물이 됐다. 광고에 등장한 한 여배우가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한 메시지도 그렇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는 각자도생이 일상화됐다. 교회는 가진 자의 편에 서고 권력자를 위해 ‘기도’한다.
어떻게 한국 교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일체화됐는가. 이 현상은 일시적인 교회의 타락일까, 아니면 뿌리 깊은 역사에서 비롯된 결과일까.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도입된 때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경세(經世)와 동학(東學)의 평등주의 인간관이 성공적으로 결합했더라면 자생적이며 공동체적인 시장경제가 가능할 뻔했다. 그러나 정작 시장경제가 도입된 것은 1876년 이후 서구 열강의 강제적 개항과 불평등 조약을 통해서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본격적인 식민지 자본주의 구조가 형성됐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일본 산업을 위한 값싼 원료와 노동력의 공급처였고 비싼 공산품 소비처로 식민지 수탈을 위한 하위 시스템에 불과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그 엄혹하던 시절, 우리 선조 기독교인은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했다.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주의적이며 공동체적 시장경제를 상상하고 구현한 것이다. 그 출발점은 선교사가 세운 숭실과 같은 교육기관이었다. ‘숭실’(崇實)은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을 숭상한다는 뜻으로 당시 유교의 관념적 교육의 대안이었다. 숭실에서는 인쇄소 목공실 농장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실업(實業) 정신과 노동의 가치, 자립의 미덕을 경험하게 했다.
한국의 간디로 불렸던 고당 조만식 선생은 숭실에서 배웠고 숭실에서 가르쳤다. 그는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을 주창했는데 이는 조선의 식민지 경제 구조에 맞서 펼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경제 운동이었다.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는 구호 아래 일본 기업이 장악한 시장에서 조선인이 만든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민족 자본을 키우자고 했다. 또한 이는 기독교적 경제 실천이었는데 고당은 근면과 절약, 정직한 경제생활, 성실한 노동을 강조했다. 자본주의는 본래 개인의 이기심을 전제로 하지만 조만식은 민족 공동체의 생존과 자립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행하게도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은 내외 여건이 무르익지 못해 안타깝게도 지속적 동력을 얻지 못한 채 소멸하고 말았다.
해방 후 시장경제는 어떻게 발전했나. 당시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국가를 수호해야 했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화에 성공해야 했다. 북한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유 시장경제가 더 우월하다는 걸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 둘은 같은 지향점을 가졌다. 반공과 시장경제의 표상이자 후원자는 미국이었고 한국인에게 미국은 곧 기독교였다. 한국 교회, 그리고 한국 사회 일반에서도 반공과 산업화 그리고 기독교는 유일한 체제요 종교였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수탈 경제는 산업화 시대 국가 주도 개발독재와 정경유착 체제로 재구성됐다. 공공선을 위한 민주적 통제나 윤리보다 효율성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했다. 그 결과 해방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이 없는 약탈적 시장체제로 굳어졌다.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잊고 중산층화했다. 민주화 이후 노동자의 삶이 나아졌나 싶었는데 21세기 들어와 양극화, 청년 실업, 비정규직 노동, 특수 고용 플랫폼 노동, 외국인 노동자 인권, 위험의 외주화 등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사람 살기 어렵고 아이 낳기 싫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
교회는 본래 모든 이념을 초월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는 100년의 세월을 거슬러 과거 고당 선생이 그렸던 자립과 돌봄의 공동체적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다시 상상해야 한다. 혹독하던 시절, 일제 압박과 공산주의의 도전을 이겨내며 기독교 정신으로 세상을 바꾸려던 선조들의 기개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