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치원… 이젠 손주 대신 할머니 돌본다

입력 2025-08-16 00:02

지난 12일 서울 양천구 주택가 골목. 건물 1층 유리문에는 ‘A방문요양센터’ 간판이 걸려 있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구립 ○○어린이집’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던 곳이다. 이제는 아이들 발소리 대신 전화벨 소리만 이따금 울리고, 방문요양 상담을 하려고 드나드는 발걸음 외에는 인기척도 거의 없었다.

20년 넘게 국공립 어린이집을 운영하다 올해 업종을 전환한 요양센터장 B씨는 “수십년간 해오던 일을 바꾸는 게 어떻게 쉽겠느냐”며 “아이들이 줄어 폐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어린이집 운영 마지막 해에는 어린이집에 10명도 남지 않았다. 인근 어린이집도 충원율이 60%에 못 미쳤다. B씨는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정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며 “폐원 소식을 들은 학부모와 아이들이 찾아와 함께 울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A방문요양센터는 입소형이 아닌 요양보호사가 가정을 방문하는 형태다. B씨는 시아버지가 4년간 방문요양 서비스를 받다가 세상을 뜬 상황을 겪으면서 업종 전환을 결심했다.

서울 양천구 C노인재가시설도 어린이집에서 업종을 바꾼 곳이다. 전환한 지 얼마 안 된 시설이어서 아직 곳곳에는 어린이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시설 인근에 사는 박현주(46·여)씨는 “우리 아이가 다니는 바로 앞 어린이집도 원생이 6명뿐이라 원장님이 운영을 계속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이곳도 폐원할까봐 불안하다”고 했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전국 어린이집·유치원 등 영유아 시설이 장기요양기관 같은 노인 돌봄시설로 바뀌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이용률 낮은 시설을 중심으로 용도 변경을 추진 중이다. 복지 수요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조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지역에 따라 보육 공백이 급격히 커진 곳도 적지 않아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15일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영유아 시설의 노인 복지시설 전환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올해 4월까지 전국 어린이집·유치원이 노인 장기요양기관으로 전환된 사례는 407건이었다. 2014~2017년 한 자릿수에 불과하던 전환 건수는 2019년 49건으로 급증했고, 지난해는 81건으로 늘었다.


지역별로는 경기 76곳, 경남 55곳, 경북 40곳, 충남 38곳, 전북 28곳 순이었다. 서울은 10곳, 인천은 24곳이었다. 세종(3곳)이나 제주(2곳)는 전환 규모가 작았다. 고령층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 전환이 빠르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는 저출산·고령화에 따라 영유아 보육시설이 노인 돌봄시설로 전환될 수 있도록 지자체에 협조 요청을 해왔다. 2021년에는 휴·폐지되거나 사실상 휴지 상태인 법인 어린이집을 장기요양기관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안내했다. 공공 치매 전담형 노인요양시설에 대한 신축 보조금을 주고, 사회복지법인 등 비영리 법인이 유휴 부지나 개축 가능한 건물을 보유한 경우도 지원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폐원하는 어린이집 대부분이 정원 대비 원생 수가 현저히 적어 공공 예산 투입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라며 “논의 끝에 고령화 대응과 시설 효율화를 위해 전환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건축법상 어린이집과 장기요양기관은 모두 ‘교육 및 복지시설군’에 속하는 데다 ‘노유자시설’로 묶여 있다. 지자체에 변경 신청만 하면 시설 용도를 바꿀 수 있다. 용도 변경은 서류상 변경으로만 완료되지는 않는다. B씨는 “어린이집을 했다고 해서 돌봄 업종 전환이 쉬운 건 아니었다”며 “보육 경험이 요양 업무로 그대로 이전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환 초기 1~2년은 요양보호사 채용과 시설 개보수에 비용이 들어 수익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국 어린이집과 유치원 등이 장기요양기관 같은 노인 돌봄시설로 속속 바뀌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전북 전주의 한 어린이집 출입문이 닫혀 있는 모습. 연합뉴스

영유아 시설 폐원이 늘면서 아동이 먼 거리를 등하원해야 하는 불편함도 커졌다. 교육부에 따르면 재원 아동이 있는 경우 폐원·휴원은 2개월 전 지자체에 신고하고 학부모에게 안내해야 한다. 지자체는 인근 어린이집 우선 입소 등 전원 조치를 진행하지만 등하원 버스 운행 등의 대책은 지자체 재량에 맡겨져 있어 지역 간 돌봄 편차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최근 10여년간 보육·노인복지 인프라와 그 수요는 급격히 변화했다. 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14년 4만3742곳(입소 149만명)이던 어린이집은 지난해 2만8954곳(101만명)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노인복지시설은 7만3774곳(19만명)에서 9만3056곳(38만명)으로 늘었다. 연평균 1500곳의 어린이집이 폐업했지만 매년 노인시설은 2000곳씩 늘어난 셈이다.

인구 구조 변화는 한층 뚜렷해졌다. 지난해 유소년(0~14세) 인구는 542만1000명(10.5%),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1012만2000명(19.5%)이었다. 1994년 유소년 인구는 1065만3000명(23.9%)으로 지난해 대비 배가량 많았으며, 65세 이상은 지난해의 4분의 1 수준인 254만2000명(5.7%)이었다.

백 의원은 “저출생·초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에 맞춘 복지시설 재편이 필요하다”며 “지역별 복지시설 수요 실태와 기능 전환 희망 시설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아동·노인 등 대상별 중장기 복지시설 구조조정·확충에 대한 종합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전환을 지원하는 법적 근거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찬희 기자 becom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