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가시철사로 울타리를 감은 장방형의 구조물이 놓여 있다. 휴전선 철조망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끔찍하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반짝이는 비즈 구슬로 촘촘하게 감겨 있다. 작은 구슬 수십 만개를 핀셋으로 하나씩 꿰어 철조망의 모든 면을 고정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미국 작가 라이자 루(56)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피해자였던 줄루족 여성 20명과 함께 1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SK그룹 산하 포도뮤지엄의 4번째 연례 기획전에 다녀왔다. 포도뮤지엄은 2022년 여름 첫 기획전을 선보인 이래 ‘관광의 섬’ 제주에 고품격 문화 예술 갈증을 채워주는 전시로 입소문이 나며 매번 다음이 기대됐다. 이주, 혐오, 소수자, 노년 등 사회적 약자와 마이너리티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정체성으로 내세웠다. 올해 전시 주제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전시는 1990년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찍은 지구 사진에서 출발한다. 사진 속 지구는 먼지 알갱이처럼 작다. “광활한 우주 속 미약한 존재인 우리는 왜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며 살고 있는가?” 전시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해결 가능성을 탐색한다.
전시에는 베니스비엔날레와 카셀도큐멘타를 석권한 팔레스타인계 영국 작가 모나 하툼(73), 언어로 권력을 해부하는 미국 개념 미술 작가 제니 홀저(75), 중국의 설치미술가 송동(59),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출신 작가 이완(46), 제주 출신 작가 부지현(46) 등 국내외 작가 13명의 작품이 초청됐다.
1.6t 콘크리트 덩어리와 철근이 수직으로 매달린 모나 하툼의 설치 작품, 269개 구리판에 ‘도널드 트럼프’ 등 정치적 함의를 담은 문장을 고고학 유물처럼 새긴 제니 홀저의 작품 등 동시대 거장의 작품이 도입부인 1전시실부터 등장해 관객을 압도한다.
2전시실 ‘시간의 초상’에서는 시간을 물질화시켜 감각하게 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일본 작가 수미 카나자와(46)는 연필로 뒤덮은 신문 수백 장을 커튼처럼 이어 붙여 시간의 반복을 물질화했다. 이완은 양쪽 벽면에 각기 다른 속도로 째깍거리는 560개 시계를 배열했다. 시계마다 이름, 출생연도, 직업, 국적이 적혀있고 그들을 인터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마지막 3전시실 ‘기억의 겨울’에서 송동은 낡은 문짝과 창문이 병풍처럼 기대 서 있는 작품을 내놓았고, 부지현은 버려진 오징어잡이 집어등을 생명을 불어넣듯 설치작품으로 변환시켰다. 일본 작가 쇼 시부야(39)의 회화 작품은 반전의 매력이 있다. 벽면에 고요한 아침 하늘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은 실상은 매일의 사건과 사고를 담은 뉴욕타임스 신문에 그린 것이다. 계엄령,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 영남 산불 등 한국 관련 뉴스에 그린 작품도 4점이 포함됐다.
전시장을 나오면 야외 정원에서 영어 알파벳으로 된 문장을 마주치게 된다. “사랑은 (중략) 혁명적 에너지다.” 스코틀랜드 작가 로버트 몽고메리(53)의 이 작품이야말로 전시가 던지는 메시지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사랑이다. 루의 작품에서 철조망을 사랑으로 덮은 작은 구슬처럼 말이다.
김희영 총괄 디렉터는 “생각의 분모가 커지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커진다. 전시를 통해 생각의 분모를 키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귀포=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