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빛났을지도 모릅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눈앞의 바다가 요동치며 갈라졌습니다. 물이 양쪽으로 솟아올라 거대한 벽을 이루고 바닥의 모래가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사이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벽 속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바닷물의 짠내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손을 꼭 잡았고 노인들은 눈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침내 발이 홍해 건너편 땅을 밟았을 때 모세와 미리암이 앞장서 노래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해방의 환호와 감사의 노래가 광야를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은 사흘 만에 무너졌습니다. 마실 물이 없다고 6주 만에 음식이 떨어졌다고 불평이 쏟아졌습니다. 찬양의 함성은 사라지고 원망의 목소리가 공동체를 가득 채웠습니다.
불평은 단순한 불만의 표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인 기운을 퍼뜨리는 전염병과 같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고기가 있었잖아”(출 16:3)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은혜를 평가절하하는 태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탈리아 심리학자인 살보 노에는 책 ‘불평 멈추기’에서 불평의 뿌리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생기는 깊은 공허감, 둘째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자기 중심성입니다. 그는 불평을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관계를 병들게 하는 습관”이라고 단언합니다.
결국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불평 없이 살아보기’의 저자 윌 보웬도 불평이 뇌를 부정의 회로로 고정해 삶 전체를 어둡게 만든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를 피해자로 만들고 스스로 무력하다고 믿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 이스라엘의 불평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불신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중요한 건 이 공급이 조건부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회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신실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던 날 아침에도 하나님은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배신과 불신의 한가운데서도 은혜를 멈추지 않으신 것입니다.
만나는 단순한 식량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필요한 만큼만 거두고 다음 날로 남기지 않는 훈련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은혜에 힘입어 사는 법을 가르치려는 메시지였습니다. 매일 내려오는 은혜 앞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주 그 훈련을 거부했고 필요 이상을 거두거나 안식일에도 나가 만나를 찾았습니다. 그들의 불평 뒤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날씨가 안 좋다고 직장에서 내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교회 예배나 찬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무 쉽게 불평합니다. 그러나 불평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잊게 하고 믿음을 약하게 만듭니다.
보웬은 불평을 줄이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중 하나가 ‘21일 불평 금식’입니다. 팔찌를 한 손목에 차고 불평할 때마다 반대 손목으로 옮기는 방식입니다. 목표는 같은 손목에서 21일간 연속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얼마나 자주 불평하는지 깨닫고 불평 대신 대안을 찾는 습관이 자리 잡습니다. 여기에 신앙인은 한 가지를 더할 수 있습니다. 불평이 입술에 오를 때 그 순간 받은 은혜를 하나씩 떠올리고 감사 기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불평을 멈추고 감사를 선택할 때 우리의 마음은 평안해지고 공동체는 건강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불평보다 강합니다. 그러니 은혜의 강물에 흠뻑 젖어 불평의 바이러스를 넉넉히 이기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허요환 안산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