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발자취를 따라 중국 열하(청더)로 여행을 다녀왔다. 셋째 날 청나라 황제의 별궁이자 정원인 피서산장을 둘러보고 오후에 북쪽으로 3시간 남짓 걸리는 무란웨이창(木蘭圍場)으로 향했다. 무란웨이창은 역대 중국 황제들이 북방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사냥 훈련을 하던 곳이다.
여행 전후로 베이징과 청더 일대에 집중호우가 내려 고속도로가 통제되는 바람에 우리는 국도를 따라 천천히 이동해야 했다. 4시간이나 걸리는 길, 중간에 화장실이 급해 작은 시골 마을의 대형 매장 앞에 잠시 차를 세웠다. 20명의 일행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없어 몇 명씩 나눠 매장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매장 구석의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에 있어서 찾기 쉽지 않았다.
나 역시 여기저기 헤매던 중 마침 일행을 안내하며 화장실에서 내려오는 중국인 여직원과 마주쳤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몸짓만으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용무를 보고 내려오는데 이번에는 뒤따라 들어온 다른 일행이 화장실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다시 그 일행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안내했다. 세 번이나 우리를 위해 2층 계단을 오르내린 것이다. 자신의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친절이었다.
버스에 오르며 까닭 모를 감동이 일었다. 보통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을 갖기 마련이다. 이방인을 향한 경계심 대신에 작은 친절을 베푸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길을 잃은 여행자에게 가장 빛나는 환대였다. 게다가 그녀는 우리 일행이 한국인임을 알고는 더욱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K한류의 영향일까. 어쨌든 이름조차 모르는 시골 마을의 한 평범한 여직원이 보여준 작은 친절은 그 마을 전체를 따뜻하게 느끼게 했고 마음속 한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한층 부드럽게 바꿔놓았다.
평범한 한 사람의 작은 친절은 공동체 전체의 이미지를 바꾸는 힘이 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한 카페 사장이 길 잃은 외국인 관광객을 직접 목적지까지 태워다 준 일이 있었다. 이 사연은 SNS를 통해 퍼지며 한국인의 따뜻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르내렸고 수많은 외국인이 마음속에 한국을 더욱 정겹게 새겼다. 일본 교토의 한 작은 정육점 주인은 20년째 매일 아침 노숙인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했는데, 이 꾸준한 배려가 마을의 분위기를 바꾸고 지역사회의 나눔 문화를 확산시키는 씨앗이 됐다.
반면에 한 개인의 무례함은 공동체 전체의 이미지를 흐리게 한다. 몇 년 전 한 카페 직원이 외국인 고객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장면이 SNS에 퍼진 뒤 해당 프랜차이즈 매출이 크게 줄었다. 나 또한 외국을 여행하던 중에 한 택시 기사가 우리를 속이고 요금을 부풀려 받아 그 나라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게 바뀐 경험이 있다.
한 여행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나라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 나라에서 만난 한 사람의 미소에 달려 있다.” 내가 외국의 카페에서 바리스타에게 건네는 감사 인사 한 마디, 지하철에서 나이 든 외국인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양보하는 일, 거리에서 길을 헤매는 외국인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등의 작은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그 나라의 얼굴이 된다. 오늘 내가 베푸는 작은 친절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씨앗처럼 심겨 그가 속한 공동체를 더욱 따뜻한 공간으로 물들일 것이다.
4시간을 달려 도착한 무란웨이창은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낮은 구릉 위에서 돌아가는 풍차,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와 말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본 어떤 이국의 풍경보다 아름다웠고, 그곳 사람들도 친절하고 다정했다.
박수밀
고전학자
한양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