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1주일 걸렸던 보고서 하루 만에 완성…
동료 대신AI와 일해야 하는 현실 벅차다
동료 대신AI와 일해야 하는 현실 벅차다
8년 만에 회사원으로 돌아왔다. 그게 석 달 전이다. 처음 출근해 놀란 건 속도였다. 마케팅본부장으로서 나의 첫 번째 업무 지시는 중국 마케팅 시장 조사와 보고서 제출이었다. 최소 1주일은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인터넷 기사나 블로그 자료부터 훑어볼 테고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도 읽어봐야 할 터였다. 깊은 조사가 필요하면 학술연구 사이트에서 논문 찾아보거나 관련 기관 전문가, 교수 등에게 자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각자 조사한 자료 내세우며 열띤 토론 펼치고, 방향과 전략 설정한 후엔 자료 취합하고 정리해 보고서 다듬고, 그러다 보면 야근과 밤샘 작업이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약간은 피곤한 듯하면서도 한껏 뿌듯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프린트해 제출해 주겠지?
혼자 앉아 그런 상상을 했더랬다. 10년 전 내가 회사 다닐 때만 해도 응당 그런 과정 거쳤다. 그래서 팀원들 또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웬걸. 한나절 만에 보고서를 뚝딱 제출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부 메신저로 파일 하나가 날아왔다. ‘본부장님, 보고서 검토해 주세요’라는 쪽지와 함께. ‘아니, 지금 장난하나!’라는 생각으로 열어보고 경악했다. 깊이는 없었으나 그걸 상쇄할 만큼 자료가 방대했다. 우선 그 점에 놀랐다. 그걸 시각화한 양식에 또 한 번 놀랐다. 이 많은 자료를 어쩜 이리도 빨리, 이렇게 세련된 이미지와 영상으로 구현해냈지?
난 문명에 매우 보수적이다. 게을러 못 따라가기도 하고, 나름 신념도 있다. 불과 1년 전까지 2G 핸드폰 썼다면 믿으려나. 한마디로 얼리어답터 정반대 편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러니 ‘AI가 바둑 두는 세상에’라는 인용구는 곧잘 쓰면서도 정작 AI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침투해 있는지 전혀 몰랐다. 안 믿어줘도 어쩔 수 없지만 챗GPT라는 걸 회사 와서 처음 알았다. 목수로 산 세월이 길었다고 변명해 본다. 팀장에게 보고서 빨리 만든 비결을 물었다가 된통 혼났다.
“뭐, 뭐라고요? 채팅?” “챗GPT요. 아,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IT 스타트업 마케팅본부장님이 어떻게 챗GPT를 모를 수 있어요!” “미, 미, 미안합니다. 공부할게요.”
3일 동안 챗GPT만 팠다. 그리고 깨달았다. AI의 무서움을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 구했나 싶었던 중국 SNS 관련 통계, 플랫폼별 정책, 중국의 광고 관련 법령 등 모든 자료가 그 안에 다 있었다. 물론 정보의 정확성과 깊이는 매우 부족해 보인다만.
그뿐이랴. 팀원들은 챗GPT 외에도 다양한 AI 툴을 활용했다. 프롬프트에 입력값만 넣으면 AI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그걸 또 다른 AI 툴로 돌려 그럴싸한 영상을 생성한다. 통찰력과 기획력, 디자인 감각 있는 팀원 한 명이 AI 옆에 끼고 열 사람 몫을 해낸다. 그런 팀원이 여럿 모여 있으니 예전 같으면 열흘 밤낮 새워야 완성할 수 있는 보고서를 하루 만에 완성한 거였다.
문득 사무실 둘러보면 조용하다. 뭐하나 싶어 가 보면 다들 프롬프트 사이에 두고 AI와 씨름 중이다. AI에게 자료 받아 정리하고, 다시 집어넣어 검수하는 식이다. 옆에 앉은 동료보다 AI를 신뢰한다. 동료들과 논쟁하며 에너지 소모하는 대신 AI에게 의사결정을 맡겨버린다. 적막한 사무실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세탁기 같다고 느낀다. 넣고 돌리고 빼고, 오염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넣고 돌리고 빼고. 그걸 무한 반복해 새하얀 티셔츠를 기어코 만들어낸다. 한가하게 책 읽고, 어른들 만나 대화 나누는 것으로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따라가자니 또 챗GPT를 안 쓸 수 없다. 이제는 나도 출근하면 챗GPT부터 켠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업무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녹초가 돼 퇴근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오늘 난 누구와 일을 한 거지. 고리타분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AI와 달리기만 해야 하는 현실이 난 좀 벅차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AI가 아닌 사람과, 달리기가 아닌 산책을 하고 싶다.
송주홍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