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가을, 미국 동부의 한 주립대 백인 교수 부부 집에 초대받았다. 소박한 거실에 놓인 작은 그랜드 피아노 옆엔 판소리 다섯 마당 CD가 함께 놓여 있었다. 아시아학과 교수였던 남편은 한국 음악 중 판소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서양의 오페라, 중국의 경극과 견줘도 손색없고, 목소리와 북 하나로 이야기와 감정을 전하는 최고의 종합예술”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자주 보죠?” 차마 완창 공연을 본 적 없다고 답할 수 없어 웃어넘겼다. 우리가 외국인보다 전통문화 예술을 더 잘 알고 잘 누리고 있을까.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최근 문화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여러 예술단체장을 만나면서 그때 기억이 되살아났다. 2013~2014년 국립극장장이던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의 자체 제작 레퍼토리 발굴에 주력했다. 정구호 디자이너에게 안무를 맡긴 ‘묵향’을 시작으로 ‘향연’ ‘산조’, 2022년 ‘일무’까지 한국 무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무대로 국내 젊은 관객은 물론 해외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 사장은 “8월 예정된 일무 공연이 일찌감치 매진됐다”며 확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2013년 최연소로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소리꾼 김준수 같은 스타들의 등장은 남산 국립극장 풍경도 바꿨다. 박인건 국립극장장은 커피차와 팬들의 행렬에 창극의 인기를 실감한다고 했다. 이 같은 열기에 힘입어 9월 판소리 심청가를 재해석한 새로운 창극 ‘심청’도 온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은 ‘판소리 시어터’로, 기존 판소리 음악은 유지하되 캐릭터와 주제를 재해석한 무대를 예고했다. 이렇듯 10년 새 전통예술 분야는 혁신을 거듭했고, 눈 밝은 관객도 늘었다. 해외 반응도 갈수록 뜨겁다. 그야말로 ‘K컬처’의 눈부신 성과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전 세계를 휩쓴 ‘케이팝 데몬 헌터스’ 신드롬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소니가 만들고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유통하는 미국 애니메이션 ‘케데헌’은 K팝을 소재 삼아 꼼꼼한 고증으로 인기몰이 중이다. 가장 힙한 호랑이 캐릭터 ‘더피’는 한국 민화 ‘까치호랑이(호작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넷플릭스 숍에서 7만6000원에 판매되는 더피 인형은 일찌감치 동났고, 국립중앙박물관 까치호랑이 배지를 사려는 오픈런도 펼쳐진다. ‘K’ 향기가 물씬 풍기지만 지식재산권(IP)은 모두 외국 자본 소유다. 해외 콘텐츠 제작업체와 플랫폼 기업이 한국적 모티브를 이용해 막대한 이윤을 마련하는 새로운 모델의 출현이다.
이재명정부는 ‘K컬처 시장 300조원’을 앞세워 문화강국을 목표로 한다. 오늘날 ‘K-’는 음악·드라마·영화·게임·전통예술, 심지어 식품과 화장품까지 거의 모든 문화 분야에 붙는다. 여기서 ‘K’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디까지 K라 부를 수 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분야별로 저마다 K를 앞세우는 사이에 정작 ‘K’ 브랜드의 진짜 가치와 한국의 문화 주권을 상징하는 기호로서의 힘은 약해지는 것 같아 두렵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22년 조사한 국민문화예술활동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의 전통예술 관람률은 2014년 5.7%에서 2022년 2.5%로 더 떨어졌다. 갈수록 판소리도, 민화도, 한국인의 일상에서 향유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누리지 못하는데, 무어라고 규정하고 합의할 수 있을까. 정체성이 흐릿한 브랜드는 쉽게 변질될 수밖에 없고, 외부 자본이나 플랫폼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왜곡되기도 쉽다. 콘텐츠 산업 육성을 위한 전략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지속 가능한 ‘K’ 브랜드의 기준과 가치, 철학을 정의하는 브랜드 아키텍처와 같은 보다 큰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케데헌 더피 열풍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김나래 문화체육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