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창 15:13~14)
대한민국 근대사에는 이 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문서가 있다. 바로 카이로 선언이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되새겨 보는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담겨 있다. “한국인이 노예 상태임을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한다. 이를 위해 세 위대한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해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기에 필요한 중요한 작전을 장기적으로 계속 수행할 것이다.”
1943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나 아시아·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을 어떻게 패퇴시킬지와 전후 질서를 논의한 뒤 발표한 공동 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일본을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모든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탈취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와 만주·타이완·펑후 제도를 중국에 반환할 것을 결의했음을 천명했다.
이중 주목할 부분은 한국 독립 조항이다. 연합국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식민지와 달리 한국의 독립을 명확히 명시했다. 어떤 아시아 국가에도 주어지지 않은 약속이었다. 구약성경에서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노예 가운데 야곱의 후손만이 이스라엘이란 나라로 세워진 것처럼 연합국은 특별히 한국에 독립을 약속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출 3:9)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 됐듯 일제강점기 내내 국내외에서 계속된 항일 투쟁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연합국이 ‘한국인’(people of Korea)을 ‘노예화’(enslavement)한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기에 필요한 중요한 작전을 장기적으로 계속 수행할 것”을 합의하게 했다.
돌아보면 대한민국 광복사는 고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와 놀랍도록 닮았다. 1945년 7월 26일, 연합군은 카이로 선언의 연장선으로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조항을 재확인하며 일본의 최종 항복 조건을 제시하는 동시에 이를 거부할 경우 일본 본토의 “완전한 파괴”를 경고했다. 최후통첩에도 항복을 거부하던 일본은 3주 뒤 원자폭탄으로 수많은 목숨을 잃는다. 이집트 땅에 열 번째 재앙이 내려진 것과도 같았다. 결국 일본은 항복했고, 이날 한국은 마침내 광복을 맞는다.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출 12:51)
광복의 역사가 출애굽 경험과 닮았기에 짚지 않을 수 없는 가르침이 하나 있다. 바로 나그네 사랑이다. 출애굽과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노예 시절의 고통을 기억게 하면서 이렇게 명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9) 고대 사회에 많은 법이 있었지만 이방 나그네, 곧 외국인을 사랑하라는 법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에만 있었다. 하나님은 쓰라린 노예의 경험을 자유와 평등의 나라를 세우는 토대로 삼도록 이들을 부르셨다. 즉 하나님의 의로움을 닮은 나라가 되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이 부르심은 우리에게도 있다고 생각한다. 카이로 선언에서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에도 주어지지 않은 독립을 약속을 받은 나라, 대한민국. 이후 광야 같은 여정을 거쳐 회복한 주권과 자유는 우리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이제 그 장에서 귀하고 값진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하지 않을까. 이웃이 앞다퉈 칭찬하는 나라, 외국인 노동자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나라. 이런 미래를 결코 미루어선 안 될 것이다.
박성현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수석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