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기념일이 가까워지고 있다. 올해는 전후 80년이다. 일본 총리는 전후 50주년부터 10년 단위로 담화를 발표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오는 15일 종전의 날이나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다음 달 2일에 역사 검증을 근거로 한 총리 개인으로서의 메시지를 문서로 내는 것을 생각했으나 결국 보류하는 방향으로 조정에 들어갔다. 배경에는 7월의 참의원 선거 대패로 자민당에서 총리 퇴진론이 분출하는 등 어려운 당내 정세가 있다.
자민당에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70주년 담화로 끝내야 한다”라는 ‘전후 담화 불요론’(니시무라 야스도시 전 경제산업상)이나 “담화를 내면 소용없는 혼란을 부르고 해외에 이용될 뿐”이라는 소리가 뿌리 깊게 있다. 그런데 아베 담화에 대한 한국의 여론은 냉담했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진지한 맛이 없고, 유감이다. 교묘한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명했다. 이후 윤석열정부의 대일 ‘물컵 반 외교’를 거쳐 한·일 역사문제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이 많은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는데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일본인 퍼스트’를 내건 참정당 붐이 일었다. 참정당 소속 후보자는 일본인보다 외국인이 우대된다고 호소하고, 신일본국헌법(구상안)을 공표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문제투성이 정당이 지지를 확대하다니 최근의 일본인 위험하지 않아?”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냉정하게 되돌아보면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에 폐색감이 감돌 때면 일본인 퍼스트 같은 주장이 유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일본 제일주의라는 말에 많은 일본인이 달려들었다. 당시 일본 안에서는 ‘쇼와 공황’이 일어나고 농민, 노동자의 빈곤이 문제화됐다. 밖으로는 만주사변에 따른 고립의 길이 시작됐다. 이대로는 일본이 어떻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에 싸인 일본인에게 용기를 준 것이 일본 제일주의였다. 이렇게 국가주의가 대두된 가운데 1938년 국가총동원법 출현, 1940년 독일·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 체결, 1941년 진주만 공격이 일어난다. 특히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은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 같은 야단법석이었다. 대다수 국민이 전쟁에 찬성했다.
지금의 일본인 퍼스트도 같은 맥락이다. 쇼와 공황까지는 아니지만 일본은 30년간 저성장·저임금이 고정화됐다. 인구 감소로 사회보장이 방대해져 나랏빚은 세계 최악 수준인 1300조엔을 넘었다. 아베노믹스로 부동산과 주가는 올랐지만 임금은 ‘디플레 탈각’까지 참아야 했다. 드디어 물가가 크게 오르고 ‘인플레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실질임금은 계속 내려가고 있다. 앞으로도 임금 인상을 지속할 산업의 경쟁력은 보이지 않는다. 장래는 매우 어둡다. 지금까지 방식을 크게 바꿀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자민당 정치를 멈출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국민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결과가 이번 선거에서 나타났다.
정치도, 경제도 막히고 음울한 지금의 일본에서 정부에 실망한 유권자가 어디에 표를 던질 것인가. 참정당은 헌법 구상안에서도 국가주의를 숨기고 있지 않다. 공공의 이익 조항에 표기한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민의 이익은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은 국가 총동원법과 뿌리가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 제일주의나 천황 중심 등의 국가주의에 심취한 정치가가 지지세를 넓힐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일본에서 국가주의가 등장하더라도 원인은 참정당이 아니라 여론의 폭주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어지러운 국제 상황에 흔들리지 않을 유일한 길은 국력을 길러 자주국방의 저력을 튼튼히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명찬 전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