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거의 모든 퍼스널 컴퓨터(PC)에는 ‘Intel Inside’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우리 컴퓨터는 인텔 CPU를 쓴다”는 품질 보증이자 미국 반도체의 제왕 인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모바일과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자 왕좌는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등 경쟁사에 넘어갔다. 명맥만 유지하던 인텔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칩스법(CHIPS Act)’에 따라 수십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아 미국 내 공장 건설에 착수하며 부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정치의 풍랑이 다시 덮쳤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조금 대신 관세를 무기로 내세우며 제조 역량의 철저한 ‘미국화’를 요구하고 있다. 인텔이 처한 이런 격랑 한가운데 ‘미스터 칩스(Mr. Chips)’라 불리는 립부 탄 최고경영자가 서 있다. 말레이시아 태생으로 싱가포르에서 자란 탄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등에서 공부한 뒤 미국에서 40년 넘게 살아온 반도체 투자계의 전설이다. 그러나 그의 별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서 붙여줬다. 1990년대부터 중국 반도체 기업에 자본과 경영 노하우를 공급하며 SMIC, AMEC 등 핵심 기업을 키워내는 데 깊이 관여했다. 일부 투자처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군민융합’이나 인권 탄압과 연루됐다는 비판도 받았다.
여기에 과거 탄이 이끌던 케이던스 디자인이 중국 군사대학에 불법으로 설계 소프트웨어를 판매해 1억4000만 달러의 벌금을 받은 사건까지 불거졌다. 이를 놓칠세라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심각한 이해충돌”이라며 그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인텔 내부에서도 파운드리 사업 존속 여부, AI 기업 인수, 자금 조달 계획을 두고 이사회와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정권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요동치는 모습은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정권 코드에 맞으면 ‘국가 대표 기업’이 되었다가, 정권이 바뀌면 하루아침에 ‘적폐’로 낙인찍히는 사례가 수없이 있었다. 정권의 색깔이 아니라 시장과 기술의 흐름에 맞춘 일관된 산업 전략, 그것이 미국이든 한국이든 진짜 부활의 조건이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