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주의·규칙 기반·힘의 절제
역대 美대통령의 패권 유지 공식
트럼프는 깡그리 무시한 채
협박·강요로 일방적 관세 관철
기존 통상 협정 죄다 깨뜨리고
동맹도 거래 관계로 변질시키며
미국을 ‘못 믿을 나라’ 만들어
퓨리서치 세계 여론조사서
美 호감도, 中과 엇비슷해졌다
역대 美대통령의 패권 유지 공식
트럼프는 깡그리 무시한 채
협박·강요로 일방적 관세 관철
기존 통상 협정 죄다 깨뜨리고
동맹도 거래 관계로 변질시키며
미국을 ‘못 믿을 나라’ 만들어
퓨리서치 세계 여론조사서
美 호감도, 中과 엇비슷해졌다
‘관세 전쟁’이란 말이 민망해졌다. 미국과 세계의 대결에서 포성은 울리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내키는 대로 정하는 수치를 어떻게든 낮추려고 각국이 줄을 섰다. 그것을 ‘협상’이라 불렀지만 역시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서로 주고받는 거래라기보다 선물 보따리가 그에게 흡족한지 판정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그 관문을 통과한 나라들이 받아든 관세율 15%는 1930년대 스무트·홀리 관세법 이후 가장 높은 수치인데 다들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서로 치고받지 않았으니 트럼프의 승리는 일방적 강요의 결과였고, 주고받은 것도 아니어서 ‘거래의 기술’이란 책을 쓴 대통령의 특별한 재주라 볼 수도 없다. 누가 그 자리에 있어도 트럼프처럼 했다면 이렇게 이겼을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가 그만큼 세서 그렇다. 세계 최대 시장과 기축 통화를 가졌고, 유럽 한국 일본 모두 안보를 의지하고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돼서 미국이 세진 것도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줄곧 그래서 로마제국 이래 최강대국이라는 힘을 그의 전임자도 다들 손에 쥐고 있었다.
역대 미국 대통령이 그 힘을 다룬 방식은 트럼프와 달랐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응한 군사작전은 미국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 부시는 다국적군을 구성해 걸프전에 나섰다. 1990년대 호황기에 클린턴은 막강한 경제 파워를 휘두르는 대신 세계무역기구(WTO)에 중국까지 끌어들여 규칙을 정하고 미국에 불리한 판정도 감수했다. 업계 요구에 철강 관세를 꺼냈던 아들 부시는 WTO에서 패소하자 즉시 철회했고, 중국의 환율 조작에 오바마는 “약하다”는 정치적 비판을 감수하며 외교적 해법을 고수했다.
세계를 윽박질러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트럼프와 달리 세계를 규합해 미국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으며, 힘을 내세워 각국을 줄 세우기보다 규칙을 만들어 세계를 움직이려 했다. 그렇게 형성한 질서 속에서 힘의 사용을 절제할 줄 알았다. 로마는 무력 정복, 영국은 식민 지배로 제국을 이뤘지만, 미국은 국제기구와 제도적 장치를 통해 게임의 룰을 주도하며 패권을 유지해왔다. 그래야 패권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봤다. 대놓고 힘자랑하지 않는 슈퍼파워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최고의 소프트파워를 함께 얻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강하다. 트럼프는 그것을 꺼내 휘둘러버렸다. 각국을 힘으로 굴복시켜 얻은 금전적 이익을 전리품 삼아 과시하고 있다. 뜻이 관철됐으니 트럼프가 이긴 건 분명한데, 이것이 과연 미국의 승리일까.
트럼프는 비상경제권한을 이용해 관세를 밀어붙이며 한·미 FTA부터 자신이 체결했던 미·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까지 그동안 미국이 맺은 통상 조약을 죄다 깨뜨렸다. 새로 타결한 관세 합의도 변덕스러운 그의 독자적 결정에 따른 거라 얼마나 지속될지, 또 어떻게 바뀔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미국의 약속은 이제 믿기 어려운 것이 됐다.
통상 조율 방식을 미국 대 각국의 양자 협의로 바꿔버렸다. WTO 등 다자간 협의체를 무력화했다. 그런 기구를 통해 적용해온 규칙이 붕괴했음을 뜻한다. 미국이 주도하고, 미국의 패권을 지탱해주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관세 명분을 위해 동맹을 미국에 기생하고 약탈하는 나라로 취급했다. 안보는 거래 수단이자 노골적 대가가 붙는 상품이 돼버렸다. 민주주의, 자유, 평화, 집단 방위 같은 공동의 가치는 안중에 없는 나라로 세계가 미국을 인식하게 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바이든이 했던 것처럼, 미래의 유사시에 세계를 규합할 힘이 미국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경제 파트너, 룰 세터, 안보 수호자로 오랜 세월 미국이 쌓아온 패권국의 자산을 트럼프는 눈앞의 이익과 바꿔먹었다. 그것이 정말 미국에 이익인지도 알 수 없다. 최근 ‘고용 쇼크’ 통계에서 보듯, 관세 파동이 미국 경제에 적신호를 켜기 시작했다. 관세 장벽에 안주할 미국 기업의 경쟁력 약화 등 잃는 게 더 많다는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퓨리서치센터의 상반기 여론조사에서 세계인의 미국 호감도는 추락했고, 중국은 상승했다. 고소득 국가군에선 35%(미) 대 32%(중)까지 좁혀졌다. 중국의 최대 약점이던 “신뢰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이제 미국을 향하면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훗날의 사가는 관세 사태를 미국 패권 쇠락의 시점으로 꼽을지도 모른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