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강 신화도 부족 본능 힘이 작용했다

입력 2025-08-08 00:08
2002년 6월 22일 한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스페인을 꺾고 2002 한일월드컵 4강 진출을 확정 지은 뒤 손을 맞잡고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집단 본능’을 집필한 문화심리학자 마이클 모리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당시 한국 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왼쪽 위 작은 사진) 감독을 부족 본능을 절묘하게 활용한 사례로 소개한다. 국민일보DB

‘부족주의’(Tribalism)라고 하면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다.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정치 양극화와 혐오, 배제의 원인으로 부족주의를 지목하는 사람이 많다. 덧붙여 ‘부족’은 원시나 미개 사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국어 제목이 ‘부족 본능’이 아닌 ‘집단 본능’으로 정해진 이유일 수도 있겠다.

문화심리학자인 마이클 모리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부족’에 대한 오해와 통념을 깨뜨리고 ‘부족 본능’을 집단 협력을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부족주의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약점이 아니라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는 인류의 막강한 능력”이라며 “부족주의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했지만 저자는 더 정확하게는 ‘부족적 동물’이라고 수정한다. 동물도 사회생활을 한다. 하지만 인간과 차원이 다르다. 침팬지는 무리가 50마리 이상으로 늘어나면 협력이 깨지고 파벌 간 충돌이 발생한다. 100마리를 넘어서면 유혈 사태까지 일어난다. 하지만 인류는 혈족에서 씨족, 그리고 더 큰 연대를 이루는 부족으로 발전해왔다. 인간은 한 도시에 수백만명이 모여 살아도 큰 충돌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만이 가진, “집단의 지식을 공유하고 전승하는” 독특한 특성에서 발생한다. 저자는 이를 ‘부족 본능’이라고 부르고, 동료의 경험을 학습하고 모방하고 순응하는 ‘동료 본능’, 영웅의 헌신을 본보기로 삼는 ‘영웅 본능’, 전통을 배우고 잇고 지키는 ‘조상 본능’으로 분류한다.

부족 본능은 다양한 변주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켰다. 요즘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 ‘치즈’라고 하며 웃는 얼굴로 찍지만 10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은 근엄한 얼굴이었다. 초창기 카메라와 필름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이스트먼 코닥의 마케팅 결과 20세기 초 미국인은 카메라를 향해 웃는 모습을 보게 됐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시도하고 관행으로 정착되자 미소 짓기는 표준이 되고 당연한 행동이 됐다. 다수의 분위기에 순응하는 동료 본능이 작동한 결과다.

저자는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영웅 거스 히딩크를 부족 본능을 절묘하게 활용한 사례로 언급한다. 히딩크는 한국 대표팀을 이끌 때 선후배가 한방을 쓰도록 하고, 존댓말 사용을 금지하면서 ‘동료 본능’을 자극했다. 호주대표팀에서는 이기적인 스타가 팀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조정하며 ‘영웅 본능’을 일깨웠다. 또한 러시아 대표팀에서는 과거 모스크바 축구팀의 토털 축구 전통을 재발견하며 ‘조상 본능’을 상기시켰다.

부족 본능은 예기치 못한 역기능으로 인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동료 본능이 폭주하면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만 소통해 확증편향이 심해지면서(에코 체임버 효과) 당파적 맹목성에 갇히게 된다. 영웅 본능이 씨족 편애로 변질되면 다른 부족에 대한 배제와 차별로 이어진다. 조상 본능의 전통주의에는 ‘절대주의’와 ‘흑백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 부작용을 ‘독성 부족주의’라고 명명하며 비판하지만 저자는 그 해결책을 부족 본능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와 이슬람의 극단적 대립 상황에서 용서와 관용을 강조하는 ‘성경’과 ‘코란’의 구절을 주지시키는 방식이다. 많은 연구 결과 효과가 입증됐다.

저자는 “더 나은 습관을 개발하려면 새로운 동료를, 더 나은 열망을 키우려면 새로운 영웅을, 더 나은 전통을 만들려면 새로운 조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 세·줄·평★ ★ ★

·부족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국가, 기업, 사회도 하나의 부족이다
·독성 부족주의에 대한 해결책도 결국 부족주의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