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함께 여름 견뎌내기

입력 2025-08-08 00:38

그해 여름은 유독 더웠다. 12년 전 수습기자 시절이다. 보고할 만한 기삿거리는 왜 그리 없던지, 결국 몸으로 때우자는 마음에 택배 상하차 알바 체험에 도전했다. 경기도 한 물류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안성행 상차 작업에 투입됐다. 시작과 동시에 20㎏ 쌀 포대, 도자기 세트, 타이어, 과일, 물고기와 장난감, 난(蘭)까지 각양각색의 화물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불과 30분 만에 팔과 어깨, 허리에 감각이 사라졌다.

근육통보다 더 힘겨웠던 건 살인적 더위였다. 센터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찜통 그 자체였다. 숨이 턱턱 막혔다. 안경에 김이 서렸다. 중년 남성들은 하나둘 웃통을 벗었다. 밀려드는 화물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일부 작업자는 배송 트럭 사이에서 소변을 봤다. 열기가 악취와 뒤섞여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12시간 노역 끝에 녹초가 돼 귀가했다. 온몸에 땀띠가 나 있었다.

겨우 반나절 노동 끝에 깨달았다. 폭염은 공평하지 않다. 모두가 생활 속에서 탄소를 배출한다. 그 영향으로 지구의 기온은 매년 치솟는다. 그런데 피해는 주로 에어컨 바람이 닿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이들에게 향한다. 다른 누군가가 시원하게 여름을 나도록 돕는 배달, 택배, 경비, 농·어업, 건설업, 조선업 노동자들 말이다. 모든 노동은 숭고하다. 그런데 폭염은 자꾸 신성한 노동의 편을 가른다. 그 안에서 계층과 계급을 나눈다.

최근 경북 구미 건설현장서 베트남 출신 20대 이주노동자 A씨가 사망했다. 당시 기온은 37도였다. 너무 더우니 한국인 노동자들은 오후 1시에 퇴근했다. 근데 A씨를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은 그보다 3시간을 더 일했다. 이렇게 폭염 피해는 약자에게로 전가된다. 온열질환 사고는 대부분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다. 안전관리가 잘 안 되고, 냉방 설비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다. 더위는 사회적 차별, 그리고 법과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며 증폭한다.

정부는 폭염 시 노동자에게 2시간마다 20분 이상 휴식을 보장키로 했다. 그마저도 “영세 사업장에 부담이 된다”는 대통령 소속 규제개혁위원회의 반대에 막혔다가 인명 피해가 잇따르자 부랴부랴 조치한 것이다. 정부가 형사처벌 운운하며 사업주를 압박해도 큰 변화는 없다는 걸 모두 잘 안다. 정부가 전국의 노동현장을 다 전수조사할 순 없다. 돈을 받고 고용된 노동자가 원청이나 사업주, 감독관을 신고할 가능성도 낮다. 그저 본보기로 몇 군데 적발하고, 걸리면 운이 없다고 치고, 또 그렇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갈 터다.

사실 색출과 처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배려만으로 사고는 막을 수 있다. A씨는 사고 당일 현장에 처음 나왔다. 어리고 미숙한 A씨에게 누군가 물 한잔을 더 건넸다면, 초보니까 휴식 시간을 조금만 더 제공했다면 A씨는 머나먼 타국서 허망하게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맞춰야 할 공사 기한이 존재하고, 업무 할당량이 정해져 있다 해도 ‘내가 더우니 너도 더울 것’이라는 생각을 동료든, 감독관이든, 누구든 한번만 더 했더라면 어땠을까.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는 게 확실한 해법은 아니겠다. 그래도 이 살인적인 여름을 함께 견뎌낼 다른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경기도 부천의 한 아파트에선 일부 주민이 경비원에게 경비실 선풍기를 틀지 말라 요구했다고 한다. 공동 전기료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다. 나만 시원하면 된다.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어느샌가 이런 이기심이 한국인의 넘치던 정과 배려심을 대체한 것 같다. 지독히도 긴 여름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마음은 겨울보다 더 차갑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