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에 남편을 만났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목사가 될 예정이었기에 준비도 각오도 없이 결혼과 함께 덜컥 사모가 됐다. 개성 강한 나를 사모로 부르신 걸 보면 하나님도 꽤 힘드셨을 것 같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사모로 적합한 사람일까’ ‘왜 나를 부르셨을까’라는 질문에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니 말이다. 만약 사모 적성검사가 있었다면 나는 탈락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신학대학원에서 체계적으로 배우는 목회자와 달리 사모에겐 따로 배움의 과정이 없다. 정답도 없는 사모의 길을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익혀야 했다. 마치 시집와 시댁에서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며느라기’처럼 교회 안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모라기’로 살아갔다.
사모로 산다는 것이 늘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외로운 자리였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도 목회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털어놓기 어려웠다. 기댈 곳, 풀어낼 곳이 없어 답답할 때마다 하나님께 울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을 억누르고 사모의 틀에 맞춰 살아가다 지친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서 있는 걸까’ 묻게 됐다. 그때 주님께서 이런 마음을 부어 주셨다.
“너는 사모이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나의 딸이란다.” 그 음성을 듣고 밤새 펑펑 울었다.
이날 이후 하나님 앞에서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선물 받았다. 그 변화는 교회 안에서도 드러났다.
“사모가 돼서 왜 치마를 안 입느냐”던 권사님을 피해 다니던 예전과 달리 나는 당당히 말했다.
“권사님 바지가 얼마나 편한데요. 기도할 때 무릎도 잘 꿇리고요.”
“당신은 당신다울 때 가장 건강하다”는 남편의 말도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취재 현장에서 만나는 사모들의 모습은 참 다양하다. ‘사모라기’를 갓 시작한 초보 사모부터 사역의 무게에 눌린 이들, 조용히 자신의 길을 잘 감당하는 이들까지.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모가 마음 둘 곳 없이, 속마음 털어놓을 곳조차 없이 홀로 아픔을 감내하고 있다.
얼마 전 찾은 ‘사모의 전화’ 사모사랑센터는 이런 사모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곳이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100여명의 사모들을 중심으로 1998년 문을 열었다.
전문 상담 자격을 갖춘 17명의 사모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1㎡ 남짓한 전화 부스에서 언제 울릴지 모를 벨 소리를 묵묵히 기다리는 선배 사모들의 모습은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전화를 걸어온 사모에게는 이름도 소속도 묻지 않는다. 익명성이 보장될 때 비로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상담은 가정불화였다. 사모들은 교인과의 갈등은 사역 일부로 감내할 수 있지만, 남편과의 단절이 자신을 더 고립시킨다고 했다.
평균 1시간가량 이어지는 대화, 상담 말미 “아휴, 이렇게 털어놓으니 한결 숨이 트인다”는 사모들의 말은 이 사역의 의미를 알게 했다. 지금까지 약 2500여명의 사모들이 이곳에서 위로와 회복을 경험했다고 하니 그동안 쌓인 눈물과 사연의 깊이를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27년 동안 기도와 눈물로 이곳을 지키며 사모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어 준 선배 사모들의 헌신 앞에 마음이 뭉클해지고 고개가 숙여졌다.
여전히 배워야 할 것도, 가야 할 길도 멀지만 함께 이 길을 걸으며 서로를 위로해 주는 선후배 사모들이 있어 큰 힘을 얻는다. 주께서 부르신 각자의 자리에서 사모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다움의 아름다움을 꽃피우길 기도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 1:2)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