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육아는 처음인데

입력 2025-08-09 00:38

머리가 지끈거린다. 잠을 2~3시간밖에 못 잔 탓이다. 아내가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집에서의 육아를 본격 시작한 게 약 1주일 전. 수유 때문에 몸이 피곤한 아내를 대신해 거실 아기침대 옆에 매트리스를 깔고 몸을 누인다.

물론 잠자리에 들긴 하지만 아기가 의미없이 끙끙대는 소리에도 지레 겁이 나 벌떡 일어나는 게 일상이다. 깊이 잠들기란 애초 그른 일이라 불침번 아닌 불침번인 셈이다. 종일 화장실에서 졸기도 하고, 출퇴근길 멍하니 있다 내릴 곳을 지나칠 뻔한 적도 잦다. 왜인지도 모르게 악쓰며 울어대는 아기가 이따금 얄밉지만, 잠결에라도 배냇짓을 하며 헤죽 웃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아기를 따라 실실 웃게 된다.

임신부터 출산, 뒤이어 육아의 첫 문턱에 이르기까지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스스로가 놀랄 만큼 이 분야에 무지할뿐더러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이 낳을 곳과 방법을 정하고, 육아용품을 하나씩 사고, 수유 방법을 고민하고 갈등하는 과정이란 선택의 연속이다.

한 자녀가 보편적인 세상인지라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경험한 이가 많지 않고, 그렇기에 믿고 조언을 구할 곳도 드물다. 앞선 세대에게 묻기엔 과거와 현재의 육아가 너무 달라졌기에 어렵다. 부부 스스로도 어릴 때 겪은 그것과는 너무 다른 세상이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육아란 앞이 깜깜한 먼 길을 부부 단둘이 헤쳐나가는 과정과 같다.

동시에 체감하는 건, 그런 것치곤 한국 사회에서 출산과 육아로 이르는 길이 놀랄만치 획일화됐다는 점이다. 대다수가 제왕절개를 하고, 산후조리원에 가며, 아기에게 분유를 먹인다. 다른 곳에선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 여기선 당연하다. 대부분 출산, 육아 초보인 부부들은 길목마다 이런 선택지를 골라야 할 듯한 압박을 받는다. 마치 메뉴판에서 다른 요리를 못 고르게 하는 식당처럼, 특정 선택지가 관련 산업 전반에 권장된다는 이야기다. 엉겁결에 수술대에 오른 뒤 정신을 차려보면 당신은 이미 복대를 두른 채 자신의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는 낯선 이들을 산후조리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삶의 길목에서 겪는 모든 경험이란 사실 개별적이고, 그렇기에 혼란을 동반한다. 공동체 안에서의 연결성, 또 그로 인한 간접적인 체험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대목에서 취약할뿐더러 지나치게 겉보기 편의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에 의탁한다. 의사의 시간표와 병원의 수익에 맞춰 제왕절개 수술을 권장받고, 산모의 편의를 핑계삼아 육아 공장이나 다름없는 조리원에 몸을 밀어넣는다.

전 세계 소아의학계가 입을 모아 강조하는 모유 수유 따위는 효율이 중요한 이런 곳에선 그저 서로가 불편한 사치일 뿐이다. 편의와 수익과 관계없는 가치, 즉 산모와 아기 사이의 유대나 가족으로서의 체험은 언제나 뒷전이다.

사실 다른 영역에서도 한국인의 삶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선택지를 잃고,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표준화된 인생 코스를 강요받는다. 마치 게임 캐릭터를 육성하듯 영어유치원부터 특목고, 인서울 대학, 대기업 정규직, 똘똘한 집 한 채를 향해 숨가쁘게 내달린다.

비효율적인 선택이란 곧 비상식이다. 심지어 결혼과 출산, 육아 같은 지극히 사적이어야 할 영역에서조차 우리는 사실상 결정권을 포기한 상태다. 인간으로서 겪는 삶의 경험은 수익과 효율이라는, 순전히 자본주의적인 가치에 의해 좌우된다. 이 사회의 젊은 세대가 결혼, 출산, 육아 등 인간이 아득히 긴 세월 겪어온 경험을 포기하는 건 이렇게 결정권도 없이 내달리는 삶을 감당하는 게 오히려 더 비인간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올해 유독 주변에서 결혼 소식도, 출산 소식도 많다. 머릿수가 비교적 많은 특정 세대가 적령기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레 낳는 아이도 늘고 있다는 게 통계 당국의 해석이다. 설명대로라면 이런 추세는 아마 오래 가지 않을 것이기에 우린 여전히 해법을 고민 중이다. 많은 이가 쉽게들 육아휴직 확대를, 지방 분권을, 나아가 이민 정책까지도 해결책으로 거론한다.

물론 다 맞는 이야기일 테다. 그럼에도 사실 우린 그 해법들이 문제를 속시원히 해결하지 못할 것을 내심 알고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려온 삶의 경험이 후대에 전해지게 하려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건 인간적인 삶의 가치와 그것을 누릴 선택권이다.


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