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석유화학산업의 생존 공식

입력 2025-08-07 00:33

40만명 이상 고용한 중추산업
수출 이끈 산업화 주역이지만

중국 추격에 국제 경쟁 심해져
심각한 공급 과잉 위기에 직면

AI·탄소중립·기술혁신으로
글로벌 경쟁력 확보 골든타임

한국의 석유화학산업은 반도체·자동차와 함께 수출을 이끄는 핵심으로 산업화의 주역이었다. 2021년 기준 연간 출하액 1798억 달러로 세계 5위, 에틸렌 생산능력 세계 4위에 달하며 40만명 이상을 고용하는 중추 산업이다. 그러나 최근 심각한 이중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는 국제 경쟁 심화와 구조적 공급 과잉이다.

중국은 2018년 이후 대규모 설비 확장으로 세계 최대 석유화학 생산국이 됐고, 중동은 탈석유 시대에 대비해 수직 계열화된 정유·석화통합공정(COTC)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기술 차별성이 낮은 범용 제품 위주여서 가격 경쟁력과 수익성에서 밀리고 있다. 특히 2022년 하반기부터 제품 가격과 원료 가격 간 격차가 줄며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업계는 대규모 영업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둘째는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이다. 석유화학산업은 전력과 열을 많이 사용하는 고에너지 산업으로, 대표적인 탄소 배출원이다. 2050 탄소중립 목표 아래 산업 전반의 감축이 요구되며, 석유화학은 지속 가능성이라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 위기는 10여년 전부터 예견된 구조 변화와 기술 전환의 결과임에도 산업계와 정부는 장기적 준비가 부족했다. 호황기엔 단기 수익에 집중하며 친환경 연구·개발(R&D)에는 소홀했다.

그럼에도 일부 선도 기업은 기술 투자와 중장기 전략으로 실질적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반면 경기 둔화와 경영 악화 속에서 많은 기업이 R&D를 축소하거나 후순위로 미루며 산업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 과학기술 기반 붕괴를 떠올리게 하며, 부작용의 재현 가능성에 경각심이 필요하다. 최근 방영된 다큐멘터리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도 기술 기반 산업에 대한 국내의 구조적 무관심과 방향 상실을 경고하고 있다.

화학산업은 단기 성과보다 장기 기술 역량 축적과 협력 생태계 조성이 핵심 경쟁력인 만큼 전환기일수록 전략적이고 지속적인 R&D 투자가 절실하다. 이를 외면하면 미래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위기 속에서 도약하기 위해 석유화학산업은 다음 세 가지 전략적 방향에서 구조적 전환에 나서야 한다.

첫째, 과잉생산 구조의 신속한 조정이 필요하다. 수요 대비 과도한 생산 능력은 가격 경쟁력과 수익성 저하를 초래하고, 범용 제품 중심 포트폴리오는 저가 공세에 취약하다. 구조조정이 지연될 경우 고정비 증가와 수익성 악화뿐 아니라 시장 대응력 저하로 산업 전체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한 설비 감축을 넘어 사업 포트폴리오의 전략적 재편과 신시장 발굴, 친환경·고기능성 소재 중심의 제품 전략이 요구된다.

둘째, R&D 핵심 역량의 보전과 전략적 재편이 필요하다.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기술 경쟁력을 유지해야 하며, 핵심 분야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고부가가치·친환경 제품 전환을 적극 모색하고 소재 고도화와 촉매, 분리·정제 등 차세대 기술에 대한 투자가 지속돼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과 재정 지원이 필수적이다.

셋째, AI 기반 친환경 혁신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석유화학산업은 기존 작동 원리를 과감히 전환할 시점에 도달했다. 전통적인 소재·공정 개발 방식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시장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AI, 로봇 자동화, 빅데이터 기반 통합 플랫폼은 ‘발견에서 생산까지’ 자동화·최적화로 고부가가치 친환경 소재의 실용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 공공기관 및 대학과의 개방형 협업을 통한 생태계 강화도 중요하다.

AI는 탄소중립 전략과도 밀접하다. 스마트팩토리 기반 탄소배출 모니터링, 생애주기 평가(LCA), 공정 제어 최적화, 탄소포집·저장기술(CCUS)과의 결합은 탈탄소화를 앞당기는 핵심 수단이다. 이는 단순한 규제 대응을 넘어 지속 가능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적 전환이다.

지금은 단기 수익에 머물지, 고부가가치 중심의 지속 가능 산업으로 나아갈지를 결정할 시점이다. 어떤 산업도 영원하지 않으며 석유화학도 예외는 아니다.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생존과 도약의 열쇠다. 과잉생산 구조의 개편, 기술 중심 R&D 강화, AI 융합형 친환경 플랫폼 구축은 산업 체질 개선의 출발점이다. 정부의 과감한 지원과 기업의 디지털·저탄소 전략이 결합될 때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탄소중립 시대, 화학산업의 미래를 바꿀 골든타임이다.

윤제용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