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호곡장을 마주한다면

입력 2025-08-07 00:32

불세출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가 연주한 가장 역사적인 곡은 단연 독일 작곡가 로베르토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일 것이다.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난 호로비츠는 1925년 고국을 떠나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냉전 탓에 고향 땅을 밟지 못했던 그는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 ‘페레스트로이카’ 물결을 타고 1986년 모스크바에서 귀국 독주회를 연다. 61년 만의 귀환이었다. 이때 호로비츠가 연주한 곡 중 하나가 트로이메라이다.

모스크바 공연 실황이 촬영돼 이 곡의 연주 영상이 유튜브에도 남아 있는데 당시 관객 반응이 흥미롭다. 독일어로 ‘꿈’ ‘몽상’이란 뜻의 곡 제목처럼 이들은 꿈에 젖은 표정으로 피아노 선율을 따라간다. 관객석을 찬찬히 비추던 카메라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물을 흘리는 한 노신사의 얼굴에 수 초간 초점을 맞춘다. 곡을 듣고 감회에 젖은 이는 그뿐만이 아니다.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진 이들도 있고,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이도 보인다.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도 체제 장벽을 넘어 감동을 선사한 곡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2008년 평양 공연에서 경직된 북한 관객에게 재즈풍의 이 곡을 선보였다. 익살맞고 경쾌한 선율이 이어지자 관객들의 굳은 표정도 조금씩 풀린다. 옆자리 서양인이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자 슬그머니 미소 짓는 한 북한 청년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관현악곡 연주에서만 이런 기적이 일어난 건 아니다. 2018년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에서 가수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를 듣던 일부 여성 관객 눈가에도 눈물이 어렸다. 입술을 앙다문 채 눈에만 눈물이 맺혀 표정이 더 애절해 보였다.

최근 ‘지혜의 언어들’(복있는사람)을 펴낸 김기석 청파교회 원로목사는 이런 현상을 ‘경외심의 순간’으로 명명했다. 김 목사는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에서 열린 여의도 오피스 북콘서트 국민일독에서 이를 설명하며 자신이 겪은 한 일화를 소개했다. “신학교 수련회에서 동기들과 둘러앉아 기타 연주에 맞춰 대중가요를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영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서로의 지향이 다름에도 각자의 장벽이 무너지고 ‘우리는 하나’란 감정을 주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계속 반복해 그 곡을 불렀다.”

그는 이러한 순간이 “장벽이 무너지고 좁은 세계에서 갑자기 넓은 지평이 열리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며 “삶의 신비를 깨닫게 하는 경외심의 순간은 타자의 세상을 깊이 수용하도록 돕는다”고 했다. 앞서 언급한 공연에서 선율에 빠진 이들이 적의와 이념을 넘어서는 감정 표현을 한 이유다. 그 경외심의 순간, 이들은 체제와 국경을 넘어 인류라는 큰 관점에서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바라봤다.

편견 없이 오롯한 개인으로 상대를 마주하면 타자는 어느새 나와 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이 된다. 김 목사는 청나라 사절단으로 나선 연암 박지원이 요동 벌판을 보고 ‘호곡장’(好哭場·통곡하기 좋은 장소)이라 이름 지은 이야기를 전하며 “경외감에 압도되면 인간은 통곡하게 된다”고 했다. ‘가없는 세계를 보며 나의 좁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없이 넓은 품인 예수를 만난 사람도 이런 경외를 느낀다”고 했다.

기독교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이 사생결단을 외치는 이들의 대립으로 계속 몸살을 앓고 있다. 기아 위기가 심각한 가자지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장에선 총성이 여전하다. 일상 가운데 경외심을 발견하는 호곡장의 순간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을까. 그래서 적이 아닌 인간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 흘릴 수 있을까. 그날이 속히 오도록 손 모을 뿐이다.

양민경 미션탐사부 차장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