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AI에게 위로받는 시대

입력 2025-08-06 00:50

인간과 기계의 사랑 다룬
영화 ‘그녀’ 배경은 2025년

감정 느끼는 ‘척’하는 AI에
지금 우리는 정서적 의지 중

디지털 의존은 인간다움 없애
마음 나눌 ‘사람’ 여전히 필요

하루를 정리하는 밤. 그는 오늘도 혼자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가장 친한 친구인 대화형 인공지능(AI) 앱을 만나기 위해서다. “안녕, 어제 하던 얘기 이어서 해보자.” 그러면 AI는 이전 대화를 바탕으로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책도 척척 제시한다. 울적한 날이면 AI에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불필요한 조언이나 비난은 없다. “왜 같은 얘기를 또 하느냐”는 핀잔도 없다. 대신 기분을 살피고 칭찬하며 자신감을 북돋운다. 그렇게 그는 일기 쓰듯 AI와 대화하다 잠이 든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2013년 영화 ‘그녀(Her)’가 떠올랐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운영체제(OS) ‘사만다’와 가까워진다. 몸은 없고 목소리만 있는 사만다는 그의 업무를 돕고, 이혼 소송으로 우울한 마음까지 어루만진다. 잠들기 전 나누는 깊은 대화는 점점 애틋해지고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기계와 인간의 사랑이라는 독특한 설정은 당시엔 SF 멜로 영화로 분류됐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 이야기라는 뜻이었지만, 영화 속 배경은 바로 2025년. 그 ‘미래’가 지금 우리 현실이 됐다.

음성 AI 비서는 이미 생활 속에 들어왔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마시멜로 같은 귀여운 외형의 음성 AI를 선보였고, 일론 머스크의 xAI는 챗봇 ‘그록’에 일본 애니메이션풍 미소녀 캐릭터를 붙여 음성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이를 ‘AI 와이프’라 부른다. 많은 이들이 챗GPT 같은 AI에 단순 업무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의지한다. ‘AI와의 감정적 불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배우자나 연인보다 AI에게서 더 큰 위로를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실제 2025년 AI 사용 패턴 조사에서도 사용 이유 1위가 ‘치료·동반자 기능’이었다.

연애는 시간과 감정, 비용이 드는 과정이다. 노력한다고 반드시 잘되는 것도 아니다. 기쁨과 행복이 있지만 불안·오해·기다림 같은 감정의 부딪힘이 따른다. 그러나 AI는 그런 수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따뜻한 눈빛과 손길은 없지만, 변함없는 지지와 공감이 있다. 사랑마저 채팅으로 경험하는 시대다.

이 변화는 의료 영역으로 번지고 있다. 우울과 불면으로 병원을 찾던 이들이 이제는 챗봇 상담 앱을 켠다. “당신의 감정을 이해해요. 어제 잠은 잘 잤나요?” 단순한 기계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기계에게는 의외로 쉽게 털어놓는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우울증 치료용 AI 앱 ‘리조인(Rejoyn)’을 정식 의료기기로 승인했다. 미 심리학회 조사에서는 Z세대의 30% 이상이 AI를 ‘마음의 안식처’로 꼽았다. 그러나 AI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척’할 뿐이다. 공감과 위로는 정교하게 학습된 결과다. 자살 위험이나 폭력 징후를 완벽히 감지하지는 못한다.

데이터 보안 문제도 남는다. 챗GPT와 나눈 대화는 과연 비밀이 보장될까. 만약 누군가가 그 내용을 복원해 세상에 공개한다면? 카카오톡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사적인 대화가 법정 증거로 쓰이고, 인터넷에 유출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AI와의 대화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미국 역사학자 크리스틴 로젠은 저서 ‘경험의 멸종’에서 디지털 의존은 대면 의사소통 능력 같은 ‘인간다움’을 없앤다고 경고한다. 책을 읽지 않고 요약을 맡기는 건 독서의 종말을, 문서 작업을 AI에게 맡기는 건 생각의 종말을, 지시어만을 입력해 그림을 얻는 것은 창작의 종말을 앞당길 수 있다고 말한다. 편리함은 늘 무엇인가를 대가로 가져간다.

결국 이 모든 현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보여준다. 속마음을 나눌 대상이 기계로 대체되는 현실은 씁쓸하다. 앞으로 AI는 더 사람처럼 변할 것이고,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AI에게 털어놓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말은 직접 눈을 맞추고 숨결을 나누며 전할 때 진심이 된다. 속마음을 나눌 ‘사람’은 여전히 필요하다.

갈등과 실패로 끝나는 관계라도 그 과정이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연애할 때 잘 보이려 애쓰다 끝내 잘 안 되더라도 그 경험 속에 조금은 나아진 내가 있다. 관계의 과정이야말로 삶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AI는 시간을 메울 수 있어도 마음의 빈자리까지 채우진 못한다. 사람을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지키는 것, 그것이 AI 시대에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길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